▲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얼마 전 광주지방법원에서 근로자건강센터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판결이 나왔다.

한 노동자는 근로자건강센터에서 수년간 열정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사업을 위탁받은 기관에서 고용의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어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안전보건공단을 피고로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서 이겼다. 판결 자체만 보면 고용문제에서 모범을 보여야할 공공기관이 수년간 공공사업을 위탁해오면서 불법파견을 자행한 사안이다. 그러나 6년 가까이 근로자건강센터에서 근무했고 여전히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문제를 다루는 필자로서는 그 이면의 문제를 드러내야 할 모종의 의무감을 느낀다.

십수년간 안전보건 분야에 종사해 오면서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 등 공직에서 신심과 진정성을 가지고 보이지 않게 애써 온 분들을 적지 않게 알고 있다. 혹자들이 정부의 안전보건 행정조직의 문제에 대해 일리 있는 비판을 던질지라도 혐오의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에는 동참을 주저해 왔다. 그 언어를 받아 내야 하는 이들도 공공행정에 종사하지만 역시 노동자이며 나름의 애썼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로자건강센터와 관련한 문제에서 만큼은 언어의 날을 세워야겠다.

근로자건강센터는 10년간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보건관리에 있어 국내 유일한 공공 서비스 기관이었다. 애초에는 국가 산업보건서비스의 골간체계로 기획된 지역산업보건센터 모델이 노동부의 손을 거치면서 안전보건공단의 재하청을 받는 근로자건강센터로 전략과 구조가 좁아졌다.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보건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답해야 할 주체들임에도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일부 관료들은 근로자건강센터의 역할을 폄훼하곤 했고 계륵 같은 존재로 취급했다. 그럼 근로자건강센터가 아니라면 다른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지도 못했기에 여전히 근로자건강센터는 소규모 사업장 안전보건과 보건관리 사각지대 문제를 다루는 공공부문의 유일한 구조였다.

2012년 구미공단 불산누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지역 사업장 노동자들을 살피고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 가용한 어떠한 민간자원이 없었고 근로자건강센터가 역할을 했다.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이 무너지고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직업성 트라우마 관리가 문제가 되자 정부는 근로자건강센터를 활용하겠다고 했다. 필수노동자 문제,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문제가 대두되자 근로자건강센터에 떠넘겼다.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지만 사업을 맡기는 방식이 문제다.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이 국정감사나 사회적 문제제기를 통해 소규모 사업장의 산재와 직업병 문제에 대한 맹탕 행정을 지적받을 때면 근로자건강센터를 방패막이로 삼았다. 하지만 근로자건강센터 직원들은 사업주의 매몰찬 언어와 문전박대 앞에서 방패 삼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의 읍소 끝에 겨우 사업장 문을 열고 들어가 몇 마디 상담을 시작하다가도 이러한 활동이 법적 의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업주에게 쫓겨났다. 모멸감과 자괴감은 오롯이 근로자건강센터 직원인 노동자들의 몫이었고 안전보건공단의 어떤 누구도 그 모멸과 자괴감을 나눠 가진 적이 없다.

사업장의 문을 열어 주고 접근통로를 확보해 주기 위한 효과적인 행정력은 동원하지 않으면서 몇 명에 몇 건을 관리하라는 양적 성과지표만을 내밀고 성취하기를 요구해 왔다. 성과지표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부분에서 정책이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지 면밀하게 분석하고 해결방식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운영기관의 성과점수를 깎으면서 지원에 차등을 두겠다는 ‘갑’의 방식을 동원해 왔다. 그러면서도 10년간 가용예산은 늘어나지 않았다. 갑과 을의 관계에 굴복하거나 그것을 활용하는 수탁기관은 민간위탁사업의 장점이어야 할 역동성과 자율성을 잃고 양적인 성과지표에 매달리는 고식적 활동으로 수렴됐다. 새로운 모색과 시도를 위해 소규모 사업장 보건관리에 대한 노동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정책 철학과 청사진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던 기관은 한계상황에 봉착했고 소속 노동자들은 소진됐다.

근로자건강센터에서 일하며 작은 사업장의 열악함을 눈으로 확인하고 어떻게든 힘이 되고자 했던 이들이 그렇게 좌절해 왔다. 근로자건강센터 인력은 모두 안전보건 분야에 자격을 갖춘 전문가들이다. 소규모 사업장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발휘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도 효과적인 관리를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근로자건강센터에서는 민간보건관리 전문기관 종사자들보다 높은 전문성이 요구된다. 전문성을 발휘하도록 지원하기는커녕 행정철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운영방침 아래서 센터 노동자의 자존감은 산산히 부서지고 무너졌다. 가까스로 지탱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이라는 형식을 빌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소규모 사업장 문제가 제기되면, 특수고용직 문제가 제기되면, 플랫폼 노동자 문제가 제기되면 몇 페이지의 공문에 목표 숫자만 적어서 내리는 손쉬운 갑질 행정을 일삼던 안전보건공단과 노동부. 마뜩잖은 송사로 여길 일이 아니라 마땅히 그 절실함과 절박함을 돌아봐야 한다.

위탁사업 수행당사자로 ‘을’이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대신해 할 말을 다 전하기에는 지면이 좁기만 하다. 소송이 제기된 배경과 판결의 의미를 당국이 잘 살피고, 이후 어떤 구조로 정상화하고 풀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함께 고민한다면 고발이 아닌 계발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언제든 다시 고발할 것이다, 근로자건강센터와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고사시켜 온 무능하고 무책임한 안전보건 행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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