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십여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번역돼 나왔을 때 우리 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책꽂이가 있는 웬만한 집에서 그 책을 발견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실제로 그 책을 읽었는지와 상관없이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공정과 정의에 목말라 했는지 알 수 있다.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일자리와 사회의 양극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터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그의 책 <공정하다는 착각>이 번역돼 나왔다.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열풍은 없었지만, 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이 책의 제목을 원문에 좀 더 가깝게 번역한다면 <능력의 횡포>가 맞을 것 같다. 미국의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부추기고 있는 능력주의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시민들로부터 도덕적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국에는 아메리칸드림이라는 이름으로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가 있었다. 국가에 의해 사회적 격차가 조절되는 유럽과 달리 자유주의 시장 체제를 가지고 있는 미국 사회는 빈부 격차가 심하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면 계층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사회를 유지하는 장치의 하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대적으로 평등한 유럽 국가와 비교해 미국 사회는 계층 간 사회적 이동성이 현저하게 낮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강조하는 건 사회의 격차 그 자체가 아니다. 능력주의로 사회의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세력이 민주당의 자유주의자들, 또는 미국식 진보주의자라는 점이다. 한국 사회와 똑같이 미국 사회에서도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이 자식들을 명문 대학에 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명문대 입학이 곧 능력을 인정받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시험 성적 조작, 뇌물 수수 같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고, 이 사건들이 폭로되면서 사회적 불만과 갈등이 증폭된다.

자유주의자들은 기회의 평등을 입에 달고 다니며, 그것이 미국의 위대함이라고 찬양한다. 그리고 교육 기회 확대를 기회 평등의 핵심에 두고 있다. 그런데 잘 나가는 엘리트 자유주의자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그것이 트럼프가 당선됐던 이유였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교육의 기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방법은 있을까. 교육을 부와 권력의 차이, 계급적 지위의 차이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교육만 사회로부터 따로 떼어 내서 기회를 평등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런 노력을 하지 말자는 의미가 아니다. 그 한계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또 하나의 근본적인 문제는 설령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다고 가정하더라도 과연 그 결과가 공정할 것이냐는 점이다. 똑같은 시간을 공부하면 똑같은 결과가 나오는가. 기회는 같이 주어졌으니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 공정하냐는 질문이다.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과 잘 못하는 사람에게 선착순 달리기를 시키고, 매번 상위 순번에 든 이들에게만 밥을 준다고 하면 그것은 공정한 일인가.

사람에게는 기회의 차이뿐만 아니라 능력의 차이도 늘 존재한다. 인간은 똑같은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공동체에서는 이 차이가 인정된다. 실제로도 사람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사회가 유지된다. 각기 다른 능력과 재능이 있는데 한가지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공정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마이클 샌델은 사회적 인정을 주문한다. 사람을 단지 소비자로 보지 않고 생산자로서 사회의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재능에 대해 사회가 준 보상은 자신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행운 때문이다. 자신의 성공이 운명이든 신의 은총이든 우연하게 생긴 것임을 인식하고,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그런 겸손함이야말로 능력주의의 폭정이 아니라 관대한 공적인 삶으로 이끌어 갈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 사회도 공정이 화두다. 그러나 공정에 대한 인식은 착각이다. 오히려 그 착각으로 겸손하지 못한 사회가 된다. 나의 성공이 누구에게는 불운이었음을 인식하고, 함께 사는 길을 찾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파괴된다. 마이클 샌델이 주장하는 공공선을 위한 도덕성 회복이 사회문제 해결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설계하기에 앞서, 사회에서 평균 이상의 보상을 받는 이들이 그것을 운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얻었다는 착각부터 버리게 해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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