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위험에 대한 정부의 관리능력이다. 한 무더기의 법률과 지침이 있더라도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관철시키는 것은 행정에 달려 있다. 정책의지가 높다면 미비한 법안이더라도 취지를 달성하기도 한다.

두 번째는 기업의 도덕성이다. 거창하게 사회적 책임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시민과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도외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안전성은 현저히 높아질 것이다.

세 번째는 시민의 감시와 노동자들의 참여권 보장이다. 입법자나 관료든 기업이든 시민들의 적극적인 감시가 있다면 책임감을 가질 것이다. 또한 노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대처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권한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어야만 위험은 관리될 것이다.

네 번째로는 과학기술의 위험 통제력이다. 위험한 물질을 대체하고 위험을 관리하는 시스템은 상당 부분 과학기술의 성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끝으로 전문가들의 책무를 꼽아야 한다. 사전에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관리방법과 체계를 구성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서 기능을 발휘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들 각 요소가 조화롭게 때로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제 역할을 해야만 사회의 안전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한 경제지는 유명 법무법인이 개최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 웨비나에 3천300명이 신청할 정도로 기업관계자들이 몰렸다는 기사를 실었다. 법안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 중대재해예방 취지에 대한 공감이라면 반길 만한 일이겠지만, 법에 따른 처벌을 피할 방책에 골몰하는 것이라면 문제다. 이어진 기사에서는 대형 법무법인에서 고용노동부 관료출신이거나 안전보건공단을 위시한 안전보건행정기관에서 근무했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전문가들을 영입하고 중대재해처벌법에 대비하고 있다는 광고성 보도가 이어졌다. 로펌들은 중대재해처벌법 전담 TF까지 만들어 가며 기업의 돈줄을 노리고 있다. 법제정 과정에서 그렇게들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것은 법망을 피하거나 무력화해 왔던 자신들의 위력을 스스로 풍자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일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차원이라면 안전보건 분야 전문가들의 이름값과 몸값이 높아지는 것이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매개로 이들이 기업의 안전보건 관련 부서로 영입되고 경영에 안전보건의 관점을 도입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가지고 기업 체질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도대체 대형 로펌에서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일지 알 길이 없다. 안전보건 대행 서비스를 이윤의 원천으로 하는 민간기관에서 일을 시작하는 자격을 가진 전문가들은 여전히 불안한 고용과 높지 않은 급여에 힘들어한다. 하지만 안전보건행정기구의 고위직 출신들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법무법인으로 모셔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중대재해를 예방하자고 만든 법의 취지는 사장님들의 중대재해 ’처벌‘을 예방하는 데 골몰하는 로펌과, 거기에 복무하는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희석될 것이다.

1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청원에서부터 출발한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됐다. 이윤을 앞세우고 노동자·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외면한 기업의 부도덕을 질타하고, 안전보건에 있어 무능함을 보여 왔던 정부를 각성시키고자 주권자들이 움직인 것이다. 그렇게 노동자와 시민들의 상식이 사회의 안전에 대한 감수성 전반을 높이고 안전보건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창출해 낸다면, 전문가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다해야 한다.

이제 중대재해처벌법과 관련한 논의의 핵심은 책임 있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는 것이어야 한다. 누차 강조하거니와 노동자들의 위험이 기업에게도 똑같은 위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일터의 위험이 노동자들의 정신과 육체의 온전성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더라도 기업과 사업주들에게 이윤상의 리스크(위험)가 되지 않는다면 관리하지 않는다. 기업의 리스크 관리는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경영상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제 대형 로펌에서는 ‘법률 리스크’를 진단하고 선제적으로 해소하겠다고 선전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처벌이 능사일 법하다. 일터에서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위험을 관리하지 않으면 바로 기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

수십억원의 뇌물로 국정농단에 연루된 대기업 부회장이 형기도 마치지 않은 채 감옥문을 걸어 나온다. 노동자들을 죽음에 이르는 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한 이들, 책임이 있는 이들이 감옥문 앞에라도 서게 해야 한다. 처벌을 피하자면 법을 지키고 노동자의 안전을 지키면 될 일이다. 대형 로펌에 쏟아부을 돈을 안전보건체계를 구성하고 자원을 마련하는 데 쓰도록 할 일이다. 노동자들이 안전해야 기업이 리스크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는 인식과 풍토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안전보건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시민과 노동자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될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현실에 맞게 구성하고 정비하는 것이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안전보건 전문가들이 있어야 할 곳은 로펌이 아니라 노동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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