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 청년유니온 조직팀장

언젠가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시혜적인 시선으로 운동하는 게 나쁜 거야?” 우리는 동물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동물들의 비참한 삶을 구원하겠다며 동물권에 접근하는 방식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왜 ‘시혜적 시선’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나는 예를 들어 ‘우리 여성 동지들의 삶이 너무 딱하니 우리가 연대해 줘야 한다’며 시혜적 시선으로 누군가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면 기분이 나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이미 권력관계 위에선 사람들의 동정적 시선이 열받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왜’ 열받는 일이었을까? 그 이후로도 종종 그 질문을 곱씹곤 했다. 그러게, 불쌍해서 도와주겠다는데.

며칠 전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서울시가 광화문광장을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세월호 기억공간을 철거하겠다고 했고 4·16연대에서는 연일 거리 두기 1인 시위를 하며 철거를 반대했다. 여기에 청년유니온 역시 함께했다. 피켓을 들고 서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욕을 했다. “미친X. 니 어미 아비가 뒤졌냐? XX 같은 X아.” 한동안 벙해서 생각에 잠겼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모두의 공동경험이 아니었나. 이제는 세월호 1인 시위까지 욕하는 세상이 됐구나. 그 이후에도 우리는 광화문광장에 찾아갔고 비슷하게 또 욕을 먹었다. 그제야 나는 우리의 운동을 시혜적인 시선으로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사람들은 언제, 그리고 언제까지 ‘좋은 마음’으로 상대방을 도와줄까?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피해자 태도를 요구하고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들에게 최저수준의 삶을 기대하는 사람들. 그들도 분명 좋은 마음으로 불쌍한 사람들을 돕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구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권력관계는 쉽게 기울어졌고 그만큼 좋은 마음은 칼날이 되기 쉬웠다. 그에 더불어 코로나19 시기에 사회가 전반적으로 힘들어지면서 가장 먼저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는 후원금처럼, 내 삶의 안정 없이 주변을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 안정이라는 것은 좀처럼 오지 않았고, 그나마 ‘좋은 마음’도 삼켜지기 일쑤였다.

그 많던 ‘좋은 마음’들이 짜게 식어 간 순간들을 기억한다.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비정규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런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바뀌었다. 사회 전반의 약자 혐오, 그리고 공정을 앞세운 차별의 합리화 등 일련의 사건들은 백래시(사회·정치적 변화에 반발하는 심리·행동)로 해석되곤 한다. 평등한 사회에 대한 가치에 동의하면서도 내가 입는 손해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다. ‘손해’의 실체나 원인은 애초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득이 곧 나의 손해인 것인 양 분노하거나,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외치는 당당한 권리 주장 목소리가 마치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하극상인 듯이 혐오한다. ‘불쌍하니까 도와주자’가 ‘불쌍해서 도와줬더니’로 돌아온 것이었다. 가진 것보다 잃은 것에 주목하는 사회는 그렇게 혐오를 불려 나갔다. 하지만 잃는 것 없이 변화가 가능한가.

어른이 됐다고 느끼는 것은 내 자신의 생활을 책임지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해 책임을 느낄 때 그러하다. 그것은 내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떼를 쓴다고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우리가 누리는 삶은 사회적 참사의 유가족이 만들어 놓은 안전망 위에서, 최저임금 노동자의 노동 위에서 지어졌다. 혐오나 분노가 약자를 향하거나 실재하는 권력관계를 인지, 또는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은 일부 우리에게 있다. 그런 사회와 싸우고 세상에 목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바꿔 내는 일, 그 일을 구걸하고 싶지 않다. 그저 누군가의 선의에만 기대어 우리의 권리를 맡길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운동이, 그리고 연대가 내 일 같아서, 사실 결국엔 내 일이기 때문에 이기적으로 행동하길 바란다. 당신은 어떤 책임을 가지고 무엇을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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