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해방 직후 고향 의성에서 활동하던 박종근(1946). 대구 중앙국민학교 교사 시절의 이숙의(1956). 대구 약전 골목에서 딸 소은과 함께(1954). 그러나 세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다. <고 이숙의 회고록 <이 여자, 이숙의>>
▲ 해방 직후 고향 의성에서 활동하던 박종근(1946). 대구 중앙국민학교 교사 시절의 이숙의(1956). 대구 약전 골목에서 딸 소은과 함께(1954). 그러나 세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은 없다. <고 이숙의 회고록 <이 여자, 이숙의>>

2007년 9월7일 오후. 가을빛이 완연한 서울 연세대 알렌관에 예사롭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독일에서 온 동포들, 비전향 장기수들, 통일운동 원로들, 대구·경북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 딱히 하나로 구획 짓기 힘든 모임의 성격을 알려 주는 것은 행사장에 걸린 현수막 하나뿐.

“故 이숙의 선생님 회고록 <이 여자, 이숙의> 출판기념회”

현수막에는 ‘빨치산 사령관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이란 글귀가 주황색 글씨로 작게 쓰여 있다.

빨치산 사령관 박종근과 아내 이숙의, 그리고 무남독녀 유복자 박소은. 평범하지만 특별했던 한 가족이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가 짧은 문구에 담겨 있었다.

# 아내, 이숙의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그 사람을 처음으로 만난 건 1946년이었다. 경북에서도 한참 후미진 의성. 해방 후 처음으로 3·1 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그 사람은 고향인 의성 군민대회에 좌익을 대표하는 연사로 참여했다. 당시 나는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의성 중부국민학교에 갓 부임한 새내기 교사였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내 나이 스물이었다.

그의 연설은 격정적이었다.

“3·1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이 단순히 선열들의 숭고함을 되새기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인민이 주인이 되는 새 조국 건설로 승화돼야 한다.”

그날 그의 연설은 내 가슴을 걷잡을 수 없이 흔들어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열여섯 살 때부터 밤마다 마을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 말과 역사를 가르쳤던 선각자였고, 청춘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바친 혁명가였다.

그런 사람을 그저 마음에만 새기고 있던 어느 날, 그는 의성군 여성들을 위한 교양강좌에 연사로 초대됐다. 맨 앞자리에 앉은 나는 그의 눈빛과 행동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풋사랑은 시작됐다.

험악한 시절처럼 사랑은 순탄치 않았다. 10월 인민항쟁이 터졌다.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간 10월 항쟁이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에 무참히 짓밟히면서 항쟁의 주도자들은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의성 지역의 투쟁을 주도했던 그 역시 체포를 피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헤어지기 전날. 몰래 찾아든 그의 집에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재회를 약속했다. 신새벽 먼 길 나서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양말과 내의 몇 벌이 고작이었다. 그가 떠난 고향집에 찾아온 건 경찰들의 가혹한 추궁이었고, 집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견디다 못한 나는 이듬해 그를 찾아 서울로 향했다.

1947년 3월, 전국여맹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여운형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올라온 그곳에서 반년 만에 기적처럼 그를 다시 만났다. 이제 다시는 헤어지기 싫어, 그 사람과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6월10일의 일이다.

행복은 짧았고 시절은 급박했다.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하고,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됐다. 좌익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결국 그는 장기항전을 위해 월북을 택했다. 그때 내 뱃속에는 우리의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38선을 두고 기어이 전쟁이 터졌다. 빨리 피신하라는 제자의 호소에 시댁으로 몸을 피했으나, 대동청년단장으로 ‘공비 토벌’에 앞장섰던 시아버지는 우리를 외면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3월, 의성경찰서 수사과장이 그의 죽음을 알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신문에는 ‘태백산 총사령관 박종근 사살’이라는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함께 싸웠다는 간호장교의 증언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부상당한 몸으로 동지들에게 폐가 되기 싫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머리 풀고 마음껏 울 수도 없는 무도한 세월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교사로서 본분에 충실하고자 했건만 세월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았다. 1959년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주변의 눈물겨운 도움으로 겨우 풀려났으나, 세상은 박정희의 유신통치로 숨이 막혔다.

대학을 졸업한 소은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모든 것이 힘들었던 나 역시 훌훌 털고 딸이 있는 독일로 떠났다. 피는 속일 수 없는 법인지 딸은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을 했고, 사위와 시댁도 함께 싸우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생하는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대접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오랜 통일운동가였던 바깥사돈을 통해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이가 북에서 혁명열사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 한국의 월간지 <말>에 사연이 실린 것을 본 북에서 나를 초청했다. 1995년 11월의 일이다. 북측 당국은 그이에게 수여된 열사증과 국기훈장, 영웅칭호, 조국통일상을 나에게 전해 줬다. 그 사람을 기억하고 기리는 곳이 있다니, 참으로 큰 위안이고 안식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었다.

‘그는 왜 우리를 찾지 않았을까?’

50년간 풀리지 않던 이 의문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에야 풀렸다. 그의 연락병이었다던 김익진 선생이 가톨릭병원 중환자실로 찾아왔다. “대장님에게 아주머님과 따님을 찾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찾지 못했다”고. 북으로 올라간 뒤 다시 남으로 올 때 받은 명령 중 하나도 “대장님의 가족들을 찾아서 데려오라는 것”이었다고.

갑자기 온몸이 공중에 붕 뜬 느낌이었다. ‘아, 그이가 우리를 끝까지 찾았구나!’ 딸을 불렀다. 손을 꼭 쥐고 유언처럼 말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찾았단다.” 이제 울지 않고 그이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딸, 박소은
“아버지, 지금 그곳에선 어머니랑 잘 지내시죠?”

박종근. 아버지.

나에게는 먼 기억조차 없는 사진 속의 ‘사람’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도 애써 말을 아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1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빨치산 대장의 딸’에게 유학이란 만리장성을 넘는 것보다 훨씬 험난한 시련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당도한 독일. 한국과 분단을 잊고 싶어 떠난 길이었지만 그곳에도 ‘한국’과 ‘분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공부는 뒷전, 유학생들과 광부·간호사들과 함께 유신정권을 반대하는 투쟁에 뛰어들었다. 아니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대학에서 만난 남편도 시어른도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어머니를 모셨다. 1977년. 어머니는 손주 슬기·보람·한결이를 돌보면서 노후를 보내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찾곤 하셨다. 조국과 우리말을 가르쳐야 한다시며.

남과 북의 정상이 처음으로 만났던 2000년, 어머니가 홀로 한국을 찾으셨다. 모처럼 홀가분하게 친구들도 만나고 여행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친척에게서 급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한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다시 김포공항에 내렸다. 어린 시절을 보낸 대구 가톨릭병원 안팎의 풍경은 스산했지만, 어머니는 생각보다 정정해 보였다. 그런데 보자마자 나더러 서울에 가서 누굴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갸우뚱하며 전화를 했지만 상대편에서는 사람이 대구로 내려갔으니 기다렸다 만나 보라는 것이다.

늙수그레한 노인이 중환자실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나왔다. 구내식당에서 마주 앉았다. “돌아가신 대장님을 많이 닮았구만요.” 그는 아버지의 연락병이었다고 했다. 1960년대 남파됐다 30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조만간 ‘조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아내와 딸을 찾아 데려오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비록 50년이 지났지만 이제라도 대장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 같아 면목이 선다고.

내가 독일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싸울 때 어머니는 한 번도 말린 적이 없었다. 그 깊은 속을 그제야 알 것도 같았다.

2003년 북측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했다.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힌 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드디어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간 술 한잔과 큰절을 올리고 어머니 묘소에서 가져온 흙과 풀을 흩뿌렸다. 하늘에서 두 손 꼭 잡고 웃으며 내려다보시겠지만 땅에서도 하나가 되시라고.

김익진 선생도 다시 만났다. 그의 집을 찾아 따뜻한 환대도 받았다. 우리를 맞는 그의 옷에는 훈장들이 별처럼 빛났다. 아버지가 보았더라면 참으로 기뻐하셨으리라, 생각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위로를 준 김 선생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 1941년 3월 인천소년형무소 수감 당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박종근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 1941년 3월 인천소년형무소 수감 당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박종근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 나, 박종근
“조국과 혁명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나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3·1 만세운동이 전국을 진감하던 직후인 1920년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10대 중반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식민지 조선의 피 끓는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았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고향 의성에 파견돼 3·1 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미군정을 반대하고 조선의 참된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자리에서 ‘운명’을 만났다. 이숙의. 그러나 제대로 마음을 나눌 겨를도 없이 10월 항쟁의 주모자로 몰렸다. 일경의 검거를 피해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이듬해 오직 나만 믿고 서울로 찾아온 스물한 살 처녀선생과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신혼의 행복도 잠시. 6개월 만에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북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모스크바 유학을 떠났다. 멀리서 들리는 소식으로 아내의 몸에 나의 분신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 편지 한 줄 전하지 못했다.

유학을 떠난 지 2년 만에 조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당을 부름을 받아 내려간 곳은 고향 인근인 태백산과 일월산이었다.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위원장과 제3지대 사령관의 임무가 주어졌다. 당 중앙에서는 일찌감치 신분이 드러나지 않은 대원들에게는 하산과 장기매복, 책임간부들에게는 월북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토벌대는 일각일각 숨통을 조여 왔고, 빨치산은 대성골에서 궤멸한 이후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마지막 출로는 태백준령을 넘어 북으로 올라가는 길. 연락병이었던 김 동무에게 부탁했다. 아내와 유복자였던 딸을 찾아 달라고. 그러나 아내와 딸을 찾지도 못했고, 마지막 비트를 찾아가는 길에 허벅지에 총상을 당했다. 토벌대의 포위에 든 순간 최후를 직감했다. 동지들에게 나를 두고 떠날 것을 요구했으나 들어 줄 동지들이 아니었다. 한창 총격전이 벌어지는 순간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 들었다. 비록 서른두 해의 짧은 생이었으나 당과 조국에 부끄럽지 않은 삶이었노라고 생각하며 서서히 방아쇠를 당겼다. 수많은 동지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리움, 꿈에도 잊지 못할 아내 숙의와 얼굴도 보지 못한 딸 소은….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탕!”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위원장이었던 박종근은 시신도 없이 평양 신미리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평생을 오매불망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내 이숙의는 남쪽에 한 줌 흙으로 묻혀 있다. 그들의 유일한 혈육 박소은과 자손들은 독일에서 조국의 통일을 그리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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