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켜진 판교테크노밸리. <판교테크노밸리 홈페이지>

게임회사 넷마블 자회사인 넷마블 네오에서 일하던 20대 직원이 2016년 11월 급성심근경색으로 숨졌다. 이듬해 과로사를 인정받은 고인의 노동시간이 공개됐다. 발병 4주 전 한 주 78시간, 7주 전 한 주 동안 89시간 노동을 했다. 게임과 같은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서 출시일 직전 집중적으로 일하는 ‘크런치모드’ 문제가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이후 4년 사이 노조 불모지나 다름없던 IT·게임회사에서 노조가 설립됐다. 포괄임금제 폐지도 잇따랐다.

넥슨처럼 현장 노동자도 만족할 만한 근무환경 개선을 이뤄 낸 곳도 있지만, 노조가 설립되지 않은 회사에서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이 근절되지 않은 상태다. 연장근로 12시간을 포함한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는 갈 길이 멀다는 의미다. 대권 유력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주 120시간’ 발언이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산 배경이다. 윤 전 총장은 “필요한 경우 주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한 뒤 쉴 수 있는 예외조항을 둬야 한다”고 지난 19일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말했다.

22일 <매일노동뉴스>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알지 못했던, 그러나 대권주자라면 알았어야 할 최근 4~5년 사이 IT·게임업계에서 벌어진 일과 노동현실을 살펴봤다.

“넷마블 노동자 과로사가 불러온 변화”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노동자라면 모두 알고 있던 장시간 노동현실은 언제나 그렇듯 젊은 노동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있고 난 뒤에서야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2016년에만 게임회사 직원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했다. 모든 죽음이 과로사나 업무와 직접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지만 게임업계 안 노동현실의 구조적 원인을 주목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노동건강연대가 이듬해 4월 넷마블 전·현직 직원 545명을 설문조사했는데, 이 중 27.7%가 “하루에 13시간 이상 일한다(또는 일했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을 통해 조사는 사실로 밝혀졌다. 노동부는 같은해 5월 넷마블게임즈를 포함한 넷마블 계열사 12곳을 근로감독했고, 노동자 3천250명 중 63.3%(2천57명)가 주 58시간 이상 일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애초 약정된 연장근로시간보다 많이 일했는데도, 초과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것도 적발했다. 포괄임금제가 정당한 노동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회피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드러난 것이다.

넷마블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역설적으로 게임업계 노조하기 바람으로 이어졌다. 첫 주자는 화섬식품노조 넥슨지회로 2018년 9월 “크런치모드를 ‘워라밸모드’로 바꿀 게임업계 1호 노동조합”을 내걸었다. 게임회사 스마일게이트·엑스엘게임즈에도 노조가 설립됐다. 넥슨은 노사합의로 2019년 2월 포괄임금제를 폐지했고, 노조가 없던 넷마블도 같은해 포괄임금제를 폐지하는 등 변화가 계속됐다. 게임회사 노동환경이 점차 개선되기 시작한 것이다.

배수찬 화섬식품노조 넥슨지회장은 “가끔 장시간 근로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전보다 많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노조 없는 곳은
장시간 노동·포괄임금 여전”

갈 길은 멀다. 화섬식품노조 IT위원회(네이버·넥슨·스마일게이트·카카오지회)가 지난해 10~11월 성남 판교지역에서 일하는 IT·게임업계 종사자 809명을 조사했더니 10명 중 3명(32%)은 최근 6개월 새 주 52시간을 넘겨 일했다고 응답했다.

노조 유무나 기업 규모에 따라 노동환경은 천차만별이다. 차상준 화섬식품노조 스마일게이트지회장은 “노조가 없는 곳에서는 여전히 주 52시간을 넘겨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규모가 작은 곳뿐 아니라 펄어비스나 크래프톤 같은 상위 게임회사 역시 그렇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노조가 없는 사업장이자 게임업계 최초로 2017년 포괄임금제를 폐지한 게임회사 펄어비스는 재량근로제 도입 이후에도 무임금 야근이 계속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다. 지난 4월 노동부 근로감독 결과 2019년 5월부터 1년 동안 300명 넘는 노동자에게 주 52시간 상한제를 위반해 일을 시킨 것이 밝혀졌다.

윤석열 전 총장 발언과 관련해 차상준 지회장은 “알려진 일부 기업을 제외한 기업들은 포괄임금제가 여전하다”며 “게임산업이 최근 급성장했는데 아직 10~20년 전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고 비판했다. 배수찬 지회장은 “장시간 근로에 대한 안전장치도 없이 근무시간만 늘리면 된다는 것인지 말이 안 된다”며 “압도적인 다수가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중소 사업장은 먼저 포괄임금제부터 폐지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각종 예외조항에 주 52시간제 정착 ‘하세월’
삼성디스플레이도, 삼성전자도 개별동의로 특별연장근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주 120시간’을 이야기하며 스타트업 청년의 고충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주 52시간제를 지키느라 일 못한다는 스타트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부는 주 52시간제를 보완한다며 탄력적 근로시간제와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확대했고, 특별연장근로 인가사유도 추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조차도 주 52시간 정착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최근 삼성디스플레이노조는 회사에 “올해 4월부터 대형사업부 개발실 및 제조기술센터 인력들의 특별연장근로를 퀀텀닷(QD) 양산기술 적기 확보 사유로 정부 승인을 받아 운영 중”이라며 “조합원 일상생활에 무리가 가고, 근무일 간 휴식시간도 8시간밖에 보장되지 않고 있다”며 연장근로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대책을 요구했다. 특별연장근로는 재난·재해와 그에 준하는 사고 수습을 할 때 주당 12시간의 연장근로를 인가해 주당 64시간 노동이 가능하도록 한 제도다. 지난해 1월 정부는 업무량 폭증과 연구개발 등 인가요건을 추가해 기업의 활용가능성이 커졌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최근 코로나19 접종으로 인원 공백을 우려해 특별연장근로와 관련한 개별동의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창완 삼성디스플레이노조 공동위원장은 “부서별로 차이는 있지만 오전 6시에 퇴근해 같은날 오후 2시에 출근해 휴식시간이 8시간밖에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연장근로 12시간을 포함한 주 52시간제가 모든 사업장에 시행된 것은 이달 1일부터다. 2018년 7월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먼저 시작됐지만 9개월간의 계도기간이 부여됐다. 지난해 1월 50명 이상 300명 미만 사업장에도 시행될 예정이었지만 정부는 계도기간 1년 추가 부여를 결정했고, 올해 1월에야 주 52시간제가 시행됐다. 5명 이상~50명 미만 사업장은 지난 1일 시행된 상태다.

삼성전자 광주사업부에서도 노동자에게 개별동의를 받아 특별연장근로를 시행 중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는 “주 52시간 근무만 해도 근골격계질환이 발생하는 곳”이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일만 하며 어떻게 사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주 120시간 발언을 두고 “제대로 된 주 52시간제가 시행된 것은 2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법률상으로도 노사가 합의하면 이미 유연근무제가 가능한 현실 상황도 고려하지 않고 한 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50년 전 주 70~80시간을 일했는데 그때로 회귀하자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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