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장 리제순 선생.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그는 1945년 해방을 불과 다섯 달 앞두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국가지식포털 북한지역정보넷>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37년 6월4일. 조선과 만주를 타고 앉은 일제의 강압은 극에 달했다. 조중 국경에도 어둠이 짙어졌다. 그 어둠의 장막을 찢고 일단의 무장대오 150여명이 숨을 죽이며 압록강을 넘어 조선 땅으로 건너갔다. 목표는 갑산군 보천보. 대오는 모두 3개조로 흩어졌다. 1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했다. 2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해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일본 군경을 제압했다.

주력부대가 일제의 침략 거점들을 공격하는 동안 권영벽이 이끄는 정치공작조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격문 등을 뿌리며 정치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유격대는 순식간에 보천보를 공격·제압한 다음 철수했다. 뿐만 아니라 유격대는 미리 파 놓은 함정으로 일제 군경을 유인했고, 추격하는 일본군을 간삼봉에서 섬멸했다. 조선은 환호했고, 일제는 경악했다. 이 전투로 김일성 장군의 신화가 탄생했고, ‘무적황군’의 신화는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호외를 통해 대서특필했다.

보천보 전투 “조선은 살아 있다!”

보천보 전투는 수많은 항일전투 중에서 규모로만 보자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싸움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후 만주를 강점하고 태평양전쟁에 광분하고 있던 일제에 패배를 안긴 첫 전투였다. 더불어 한때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던 수많은 운동가들이 ‘무적황군’의 신화에 무릎을 꿇고 친일의 길로 돌아서던 ‘배반의 시대’에 조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일대 반격이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항일유격대의 치밀한 국내 진공작전 준비와 백두산 일대 지하조직들의 원조, 국내외의 연계가 어우러져 일군 승리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우뚝 선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인민혁명군 혹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가 주도한 이 투쟁은 ‘민생단’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던 만주지역 항일투쟁 대오 내에서 불신과 좌절을 딛고 견고한 조중 연대를 다시 확인한 역사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 진공작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조직이 바로 조국광복회였다. 조국광복회는 1936년 5월 무송현(撫松縣) 동강(東崗)에서 개최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 결성을 결정한 후 그해 5월5일 창설됐다. “전 민족의 계급·성별·지위·당파·연령·종교 등의 차별을 불문하고 백의 동포는 일치단결 궐기해 구적(寇敵) 일본 놈들과 싸워 조국을 광복시킬 것”이라는 선언과 함께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의 내용은 ① 광범한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실현해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 인민 정부를 수립할 것 ② 재만 조선인은 중국 민족과 연합해 일본 및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 영토 내에 조선 인민의 민족 자치를 실행할 것 등 10개 항이었으며, 발기인은 오성륜(吳成崙)·엄수명(嚴洙明)·이상준(李相俊) 등이었다. 조국광복회 회장은 김일성이었으며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조선인 대중을 기반으로 한 정치 활동에도 주력했다. 기관지로 <3·1 월간>을 발간하는 등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광범한 반일 세력을 모으기 위해 민족주의자·천도교·학생·지식인·반일 지주까지 참가시키는 통일전선노선을 지향한 조직이었다.

조국광복회를 창립한 다음 김일성은 권영벽 등 30여명의 정치공작원을 백두산 일대 농촌에 파견해 조국광복회 지부를 조직하게 했다. 첫 성과가 백두산의 턱밑이요, 조선의 코앞인 장백현이었다. 그 해 7월에 결성된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 위원장으로는 리제순, 청년부장에는 장증렬, 부녀부장은 황금옥(권영벽의 처)이 맡았다. 장백현위원회는 상강구·중강구·하강구 위원회를 두었고 산하에 지회와 분회를 뒀는데, 수백 개의 분회에는 농민회·부녀회·청년회·소년회뿐만 아니라 일제와 만주국 통치기관의 간부들도 거의 망라돼 장백현 일대는 말 그대로 ‘우리 사람’ ‘우리 세상’으로 불렸다고 한다.

수줍은 웃음 띤 ‘우리 선생’ 리제순

이제순은 1908년생으로 함경북도 길주가 본향이다. 이제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장백 땅에서 조국광복회 지부를 책임질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을 때 발굴한 ‘보석’이었다. 그는 신흥촌의 촌장이자 야학 선생이었는데 외모는 곱상하게 생긴 얌전한 사람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열 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다. 자신이 공부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긴 그는 형(훗날 대남사업을 총괄했던 이효순)에게 국문을 배우고 난 다음 신흥촌으로 와서는 화전민의 자식들을 위해 야학을 열고 정열적으로 계몽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와 장모, 아내도 야학으로 깨우침을 이끌었다.

형의 영향으로 소년회와 청년동맹에서 활동하던 그는 형이 감옥으로 끌려간 다음 자신에게 닥친 박해와 탄압을 피해 1932년 처가가 있는 갑산으로 이주했다. 그곳에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주역인 박달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제순은 그들과 함께 비밀독서회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김일성 부대에서 파견한 리동학에게 발탁돼 밀영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 관해 김일성 주석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리제순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전하고 있다.

“우리는 리제순을 위한 단독강습을 진행했다. 강습의 주제는 조선혁명의 로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 것이었다. 이 강의는 내가 담당했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강의, 국제당사강의는 리동백이 해 주었다. 단 한 명의 수강생을 위해서 여러 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 가며 그처럼 알심 있게 강습을 진행한 실례는 항일혁명투쟁의 전 기간 그때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각별한 인연이었고, 특별한 배려였다.

혜산사건과 가슴 아픈 최후, 그리고 국가보안법

그러나 이런 활동을 일제가 그냥 둘 리가 없었다. 모든 밀정을 동원해 장백현위원회에 대한 대대적인 탐색을 벌였다. 일제는 ‘장백특무공작대대’를 만들고 곳곳에 특무를 파견해 정보를 탐지했다. 이때 김태국이 적들에게 걸려들었다.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곤장 몇 대를 맞고는 권영벽이 17도구에 있다는 것을 불고 말았다. 일본 경찰들은 권영벽과 서응진을 체포했다. 소위 ‘혜산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태국의 고발에 의해 권영벽·리제순·박인진·서응진·박록금 등 수많은 핵심 인물들이 검거됐다. 일제는 장백 일대의 지도핵심들을 대부분 잡아 가두고 수사 폭을 넓혀 서간도 전역과 압록강 건너 갑산 일대에까지 마수를 뻗쳤다. 결과 장백현 당위원회와 장백현 조국광복회는 마비되거나 해체 상태에 이르게 됐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당원, 조국광복회 회원, 반일 인사들이 체포됐는데 일제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만 167명이나 된다. 일제는 이들을 전원 ‘치안유지법(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일제는 기관지 <화전민> <조선공산주의자의 임무> <동지여 단결하라!> <일중전쟁과 조선청년의 임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등 출판물과 권총·탄약·단도 등을 압수했다. 일제는 1941년 8월28일 리제순과 권영벽 등 6명을 사형에, 박금철 등 4명을 무기징역에 처했다. 혜산사건으로 장백현 당위원회와 조국광복회는 철저히 파괴됐다. 이는 향후 동북항일연군(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에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됐다.

1945년. 리제순의 아내 최채련은 어느덧 여덟 살이 된 막내딸과 함께 서울 서대문형무소 면회실에 나타났다. 엄마는 창살 너머 수염이 거뭇거뭇한 사내를 ‘아빠’라고 불렀지만, 난생처음 아빠를 본 딸은 차마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리제순이 쇠고랑을 찬 손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비로소 딸의 입에서 ‘아버지’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곧 집으로 가마.”

허망한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1945년 3월10일, 일제는 리제순을 형장에 불러 놓고 마지막으로 회유했다. “지금이라도 천황에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면 사형만은 면해 주겠다”고. 리제순은 아무 말 없이 하늘만 쳐다보았다. 해방된 조국과 아내와 막내딸을 그리면서….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서대문형무소도 아무런 말이 없다.

얼마 전 항일투쟁을 다룬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출판한 김승균 대표가 공안당국에 의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법원은 극우단체의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지만 검찰과 경찰은 자택과 출판사·인쇄소를 압수수색했다. 사건이 터지자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외신이었다. BBC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어떤 내용이기에 출판을 못 하게 한다는 겁니까? 21세기 대명천지에 이게 말이 됩니까?”

그는 슬픈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더군다나 촛불정부라고 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 정용일 사단법인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정용일 사단법인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어느 국회의원은 “국가보안법? 그거 이미 사문화된 거 아닌가?” 하고 강변한다. 과연 그런가? 리제순이 그토록 꿈꿨던 해방된 조국의 남녘에는 그의 흔적조차 없다. 우리는 진정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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