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구라’의 종말은 없다

지금 우린 국경을 순식간에 넘는 온라인 연결망을 맘껏 쓴다.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더 크고 더 넓은 범위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있고, 멀리 오래 전달할 문자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족과 같은 공동체를 만드는 상상력이 있다. 상상력은 초연결 사회의 연결망을 타고 흐른다.

‘역사의 종말’이나 ‘이데올로기 시대는 갔다’는 여러 주장이 있었지만, 저마다 목적을 담은 이데올로기(사상·이념)는 사라진 적이 없다. 각종 이데올로기가 팔팔하게 살아 지구 멀리멀리 동네 구석구석 영향을 미친다. ‘이데올로기 종말론’이야말로 ‘구라’다. ‘구라’는 사라지지 않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질기게 활약한다.

노동 현장에서 어떤 계급의 것인가를 따지며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많이 듣고 쓰는 편이었지만, 정작 나는 이 단어가 별로다. 첫째, 일상 용어로 쓰기엔 단어가 너무 어렵다. 둘째, 이데올로기가 뭔지 알아보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엄청 어려운 이론 때문에 골치 아팠다. 셋째, 계급 이데올로기에 관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학습에 익숙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독서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맞겠지만,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몸으로 일하는 현장에선 별로였다.

이데올로기보다 이야기

요즘 한국어로 ‘이야기’, 영어로 ‘스토리(story)’라는 말을 많이 쓰는 편이다. 이데올로기에 비해 일상 용어로 쓰기 쉽고 편하다. ‘담론(談論)’이나 ‘서사(敍事)’라는 말을 가끔 듣는데 이런 말은 이론적인 전문가들의 것에 가깝다. 이야기는 평범한 시민의 일상적인 것이다. 담론이나 서사나 이데올로기는 개념 토론에 어울리지만 이야기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과 수다들에 가깝다. 이야기는 교실이나 학습하는 공간을 넘어 일상의 곳곳에서 생겨나고 발견되며 나누고 오간다. 이야기는 글로 쓰고 말로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몸으로 쓰는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 이야기를 써 왔고 써 나갈 것이다. 소설·드라마·영화는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가 이야기를 만든다. 실화를 바탕으로 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 지어낸 얘기다. 그러나 일상에서 살아 내는 것이 우리가 쓰는 인생 이야기다. 요즘엔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아 온라인 공간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몸으로 쓰는 인생의 일부며 삶을 모두 담지 못한다.

우리가 쓰는 이야기는 시대라는 시간과 사회라는 공간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즐거움과 아픔이 엇갈리는 사건으로 이뤄진 종합 예술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곧 어떤 인생 이야기를 쓸 것인가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명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고, 어떤 이는 돈벌이를 중심에 두고, 또 어떤 이는 함께 누리는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쓴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기에 약간 다른 스토리 라인(이야기 줄거리)을 가진다. 그러나 작은 집단에서부터 큰 집단에 이르는 관계 속에 살기에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야기를 쓴다. 이것들이 모이면 국가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이룬다.

이야기를 바꾸려는 사람들

드라마나 소설은 재미를 더하기 위해서 슬프고 아프고 심지어 막장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나 내 인생 이야기를 이런 막장으로 처박고 싶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비극보다 해피엔딩을 원하고 내가 엑스트라가 아닌 주인공이 되는 인생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한다.

이야기를 바꾸는 것이 항상 좋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최근 만난 몇몇 고참 노조 활동가들은 공공부문과 제조업 모두에서 공정성과 능력 이데올로기를 가진 조합원의 등장을 우려했다. 자칫 민주노조가 쪼개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주목하지 않았고 때로는 외면해 온 사태의 진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한국의 노조 현실을 보여 주는 계기가 아닐까.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이어진다. 야당에서 새로운 이야기꾼이 등장했다. 하도 구린 사람들이 판치니까 세대론을 들이대는 것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그런데 같은 세대라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살까. 그처럼 여러 가지 자원을 가지고 촉망받는 세대와 힘겹게 버티는 청년들이 같을 수 없다.

한동안 ‘진정성’이라는 말이 떠돌던 때가 있었는데 근래에는 ‘공정성’이라는 말이 떠돈다. 사실은 능력주의라는 우려가 여전히 크다. 부모 찬스든 재산이든 자원이 많아 능력을 키운 사람이야 ‘능력’을 앞세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이 능력을 평가당하고 차별당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새로운 정치는 없고 개소리만 늘어날 뿐이다. (이런 용어에 대한 우려들 때문에 덧붙인다. 개소리라고 할 때, ‘개’는 멍멍이가 아니라 개살구나 개복숭아처럼 ‘흡사하지만 다르다는 의미’의 접두어다. 개소리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해리 G. 프랭크퍼트의 <개소리에 대하여> 참고)

일터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는 다양한 사람들을 봤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의 직장은 사용자가 중심이고 직원은 늘 엑스트라였다. 이런 이야기는 기업의 경영자나 관리자에게 재밌을지 모른다. 매일 똑같은 주인공이 이미 결정된 스토리를 가지고 지시하고 감독하는 걸 보는 직원들에겐 재미없다. 이제 스스로 주인공이 돼 다양한 인물들로 채워진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노조라는 물건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새 이야기를 쓰려는 시도다.

새로운 스토리 라인을 위해

사례들을 돌이켜 보면 새로운 이야기는 각성에서 시작한다. 매번 불만을 안고 윗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뒷담화일 뿐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빤한 이야기로 살아 온 것은 우리가 침묵했기 때문이라는 자각과 참여가 중요하다. 걱정도 있다. 그들을 응원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아주 오래되고 빤한 스토리를 가지고 연출과 감독을 맡아 그들을 지휘하려는 훈수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스스로 노동의 특성을 파악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해 ‘스토리 라인(이야기의 줄거리)’을 짜면 더 성공적이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재난기를 슬기롭게 이겨 내고, 기후위기와 산업 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이 써 나갈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덩달아 가슴이 뛴다. 이야기를 바꾸려는 사람들에겐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새로운 말은 지금까지 그저 그랬던 것들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똑같은 단어를 쓴다면 새로운 스토리가 아닌 또 반복되는 낡은 스토리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관계들이 더 많이 발견돼야 한다. 늘 만나는 동료들 안에서 다른 잠재력을 발견할 때, 관계는 새로워진다. 이런 새로운 것들이 가득할 때 풍성하고 새로운 스토리 라인이 탄생할 것이다.

갑자기 쾅 터지고 일거에 바뀌는 일은 없다. 작은 위험들이 쌓여 나쁜 사건이 터지고 좋은 이야기들이 쌓여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설계에는 새로운 도전을 해 온 현장 노동자들과 그들 속에서 발견된 새로운 언어들, 그렇게 엮인 새로운 관계들, 그 관계들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스토리들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한 사업장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노조운동의 새로운 이야기를 쓰기 위해 노조에 대한 새로운 개념 설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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