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으로 국내 언론이 떠들썩하던 시기에 해외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영화는 <노매드랜드>다.

▲ 황진미 영화평론가
▲ 황진미 영화평론가

지난해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노매드랜드>는 중국계 여성 감독 클로이 자오가 연출한 극영화다. 일종의 로드무비로, 미국 서부의 광활한 암석사막과 석양이 펼쳐진다. 연기도 압권이다. <파고>로 유명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주연을 맡았다. 원래 길 위에서 사는 실제 인물들을 캐스팅해 다큐멘터리의 질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1.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후 급증하다

‘노매드’는 차에서 먹고 자며 떠도는 ‘유랑민’을 뜻한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급증했는데, 개조한 밴이나 캠핑카를 타고 임시직 일자리를 찾아 떠돈다. 연말에 주문량이 폭주하는 아마존 물류센터, 휴가철 국립공원 캠핑장, 수확철 농장처럼 계절을 타는 일자리에서 단기 ‘알바’를 한다. 대개 금융위기로 집을 빼앗기고 추락한 중산층이거나 은퇴 후 연금으로는 도저히 집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노인들이다. 영화는 이들을 취재한 제시카 브루더의 르포집 <노매드랜드>를 바탕으로 각색한 것이다.

영화는 “2011년 1월31일 석고보드 수요 감소로 인해 미국 네바다주 엠파이어 공장이 폐쇄됐으며, 이 도시의 우편번호 사용이 중지됐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펀은 살림살이를 모두 창고에 넣고, 몇몇 소중한 물건들만 챙겨 길을 나선다. 펀은 자신을 ‘홈리스’가 아니라 ‘하우스리스’라 말한다. 번듯한 가옥이 없을 뿐, 집 없이 떠도는 거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영화는 펀의 여정을 따라 다른 노매드들을 보여준다. (실제 유튜버인) 밥 웰스의 홍보영상을 보고 펀은 노매드들의 모임을 찾아간다. ‘노매드’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삶의 기술도 배우고 물물교환도 하고 캠프파이어를 하며 이야기도 털어놓는 일종의 자조 모임이다. 화장실 문제가 빠질 수 없다. 노매드의 삶이란 ‘자기 똥을 자기가 치워야 하는’ 실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펀은 풀숲에서 엉거주춤 볼일을 봤지만, 중반부 이후엔 큰 드럼통을 마련해 차 안에서 볼일을 본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을 들려준다. 린다 메이는 2007년 금융위기로 집을 잃고 노매드가 됐다. 밥 웰스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충격을 받고 노매드의 지도자가 됐다. 스웽키 할머니는 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삶을 병원에서 낭비하기 싫어서 추억이 담긴 풍광을 다시 한번 보고 죽겠다는 일념으로 떠돌아다닌다.
 

노매드랜드
▲ 노매드랜드

2. 세 번의 정주 제안

펀의 사연도 조금씩 드러난다. 석고보드 회사원이었던 남편과 관사처럼 생긴 주택에서 살던 펀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다가 마을이 폐쇄되자 노매드가 됐다. 그렇다고 펀이 아예 살 곳이 없어서 노매드로 사는 건 아니다. 영화는 펀이 여러 번 정주를 제안받지만, 유랑을 택하는 것을 단계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는 마트에서 만난 옛날 이웃의 제안이다. 물론 그 제안은 관객 눈에도 옹색해 보였다. 두 번째는 고장난 차 수리비를 빌리러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여동생을 찾아갔을 때다. 동생은 번듯한 집에서 살고 있으며, 언니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펀은 동생 집이 불편하다. 그 불편감이 제부 등과 펀이 나누는 대화에 함축돼 있다. 펀은 부동산으로 돈을 번 남자들에게 “사람들에게 전 재산을 투자하라고 해서 빚쟁이로 만들고, 감당할 수 없는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동생네 부부와 펀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이라, 펀이 동생 집에서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영화는 더욱 강력한 세 번째 제안을 마련한다. 노매드 생활을 하면서 친해진 데이브는 아들 집에 들어가 손주를 돌보며 산다. 데이브는 펀에게 청혼한다. 아들 내외도 펀을 반긴다. 이들 가족은 펀의 삶을 이해한다. 뮤지션인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피아노를 치는 모습은 눈물 나게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펀은 환상적인 제안에도 집이 아닌 길을 택한다. 쾌적한 침대에서 잠들지 못하고 굳이 마당에 세워둔 밴에 들어가 자는 펀의 모습은 이미 ‘차박’이 더 편한 몸이 됐음을 말해 준다. 옛집에 돌아온 펀은 살림을 모두 팔아 정리하고, 다시금 길을 떠난다.

영화는 오프닝 자막이 가리키듯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의 중산층의 몰락을 배경으로 삼지만,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펀이 노매드가 된 이유도 마을 폐쇄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도 있지만,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개인사가 얽혀 있다. 어쩌면 쓸쓸한 낭만이자 치유 혹은 도피 같은 여정이다. 영화는 단지 집이 없어 노매드가 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신념이나 정서, 혹은 사연에 기인한다고 보는 편이다. 가령 지상에 큰 집을 짓지 않겠다는 무소유의 신념을 갖거나, 가족을 잃은 상처가 있거나, 광활한 대자연에 몸을 맡기고 어디론가 표표히 떠나는 정서가 있는 까닭이다. 데이브의 아들은 알콜 중독자 모임에 나가 보면 그 도시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의 주제가 담긴 심오한 대사다. 알콜 중독자가 되든, 유랑자가 되든 거기에는 사회적인 문제와 개인사가 맞물려 있기 마련이다.

3. 웨스턴의 쓸쓸한 로망에 취하기보다

<노매드랜드>는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와일드>를 떠올리게 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후 싸구려 모텔에서 장기투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취재해서 만든 극영화다. 고발의 시선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돌봄의 부재와 공적 개입의 딜레마를 예리하게 짚어 낸 션 베이커 감독의 수작이다. 이에 비해 <노매드랜드>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다소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정서로 흐른다. 영화 <와일드>와 유사한 정서인데, <와일드>에서 주인공의 극한 여정은 어머니와 사별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함이었다. 차박을 하며 떠나는 <노매드랜드>나 발이 부르트도록 걷는 <와일드>나, 미국 서부개척 시대의 로망과 더불어 개인적 상처를 치유하려는 ‘뉴에이지’풍의 영성이 가득한 고행과 순례의 여정이다. 끝없는 서부의 광야로 ‘뱅가드’(펀의 차 이름)를 타고 사라지는 정서는 웨스턴 무비와 닿아 있다.

사막 대신 산이 있고, 유목민의 정서 대신 농경민의 정서가 강한 한국에서는 어떨까. 도시를 떠난 한국인은 노매드가 아닌 ‘화전민 되기’를 시전한다. <나는 자연인이다> 속 ‘자연인’들 말이다. 그들 역시 경쟁 사회에서 패퇴한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사회·문화적 배경과 가족의 죽음이나 개인의 질병 같은 개인사를 지닌다. 또는 영화 <소공녀>가 떠오른다. 주인공은 월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여행 가방을 끌고 돌아다닌다. 결혼하자는 사람도 있지만 거부하고 “나는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이라며 길 위에 남는다. 그는 ‘여행자’와 ‘행려자’ 사이에 위태롭게 놓인다. 웨스턴의 쓸쓸한 로망에 취하기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악화할 베이비부머 세대의 노후대책과 청년빈곤 문제에 귀 기울여야 할 때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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