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다들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최근 수 년 안팎으로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 건강과 관련한 제도 중 가장 두드러진 진전은 업무상질병에 관련한 산재판정 및 요양·보상 관련 부분에서 있었다고 생각한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는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옹호하는 위원들이 적지 않다. 적용이 요원하기만 했던 (한때 당연 인정기준이라고도 불렸던) 업무관련성 추정의 원칙이 불충분하나마 도입됐다. 업무관련성평가 특진제도가 생겼고, 침습적 치료와 천편일률적 물리치료 중심에서 재활과 직장복귀를 전제로 한 체계적 접근이 근로복지공단 병원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근골격계 질환을 중심으로 공단 병원을 경험한 노동자들의 호평을 자주 전해 듣는다. 업무관련성 인정에 있어서 법원 판결 기준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고, 직업성 암이나 희귀성 질환에 대한 전향적인 판단이 내려지고 있다. 말도 탈도 많은 질병판정위지만 공정성에 있어서 이전에 비해 진일보했음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가장 반동적이고 후진적인 시스템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 변화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필자가 가까이서 그 변화를 지켜봤기 때문에 발생한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업무상질병 산재요양 승인 건수와 신청 건수의 급격한 증가가 변화와 진전을 대변하고 있다. 그 진전은 노동조합의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분투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편에 선 법조·노무·의학 전문가들의 역할도 적지 않다. 물론 산재보험기금의 안정적 재원에 기대어 다양한 정책 동원이 가능했던 점도 있다. 평균 산재보험료율이 2018년 기준 18‰에서 2020년 15.6‰로 감소했지만 산재보험기금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지난해말 22조원이 넘는 규모다. 재정분석에는 문외한이지만 국회예산정책처 보고서에 따르면 기금은 2028년에 43조2천억원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니 고용보험·건강보험·노인장기 요양보험 등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산재보험의 사회적 기능과 제도의 정상화에 대해서 고민하고, 변화를 도모한 공무원들과 산재행정 일선에서 감정노동과 소진을 경험하면서 과중한 업무를 감당한 공단 노동자들의 노고 역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50일 넘게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요양 처리지연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당장에 생계와 고용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수개월 이상 소요되는 업무상질병 요양승인 절차는 이미 문제적이다. 산재적용 대상이 넓어져야 한다는 당위를 인정하고, 여전히 숨겨진 산재가 많다는 현실을 반영한다면 산재 신청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당연히도 처리 절차에 대한 행정적 부담은 늘어날 것이다. 현재의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얼마간의 인력을 확충해 대처할 수준을 넘어설 것이 자명하다. 2008년에 설치된 질병판정위에 대한 당시의 시대적 요구는 ‘객관성과 공정성’이었다. 시대적 요구가 ‘신속성’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동안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구조는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부족하지만 ‘객관성과 공정성’ 시비는 줄어들었고 산재승인 사례는 늘어났다. 업무상질병을 심의하면서 직업과 질병, 산재보험의 개념과 기능에 대한 논의에 노출되는 각계 전문가들이 늘어나면서 객관성과 공정성의 수준이 현저히 후퇴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이다.

신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제안되고 있는 추정의 원칙 확대적용은 산재승인이 ‘통상’의 행정 절차로 수행됨을 전제로 가능하다. 모든 개별 사례들을 질병판정위원 각각의 의학적·법리적·철학적 잣대로 논하고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산재보험 기능까지 고민하면서 판단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잘 훈련된 담당자라면 판단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추정의 원칙 틀(대개 종사한 직업 또는 직무·근무 기간·유효기간 3요소를 제시)을 만들어서 이 기준을 충실하게 적용하도록 행정적 절차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객관성과 공정성’은 기준을 적용할 때 요구될 일이다. 이러한 행정적 절차를 단시간 내에 처리해 줘야 노동자들도 재심의나 행정구제·재판 등 높은 심급의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을 확보할 수 있다.

전문가나 그들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 조직을 행정적 판단 절차와 분리하고, 산재 신청과 승인 통계를 기반으로 해 추정의 원칙을 조정하는 업무, 일선의 행정 담당자들을 교육하고 전문성을 높이는 업무, 그리고 기준의 경계선에 있어 행정적 판단이 어려운 사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업무를 맡으면 될 일이다. 산재승인 기준(추정의 원칙)은 사회적 ‘합의’ 기준이며, 의학적이고 역학적인 근거들은 주어진 재원이나 사회의 수용성을 기준으로 대상 질병군과 노동자군의 우선 순위 선정을 위한 참고자료로 기능해야 한다. 위원회는 특정 산업에서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위험일지라도 폭넓게 승인하는 추정 원칙 등을 통해 갈등으로 인해 소모되는 사회적 자원과 비용을 줄여 예방을 위한 활동에 투입될 수 있도록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위와 신뢰를 갖춘 조직이 돼야 할 것이다. 무책임한 과잉진료 혹은 무차별적인 검사로 증상 없는 상병을 만들고 불신과 그에 따른 비용을 초래하는 사안들에 대한 조치를 고민하는 것도 새로운 위원회의 역할이 되기를 기대한다. 할 말이 많지만 일단 논의의 시작이 중요하다.

완벽한 제도란 없는 법이다.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제도적 공백으로 인한 문제를 제기하고 제도의 완성도를 높일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행동과 활동 또한 당연한 가치가 있다. 제도를 운영하는 근로복지공단, 정책적 설계를 담당하는 고용노동부, 이해 당사자들이 이제 테이블에 앉을 시간이다. 돈도 있고 당위도 있다. 정책 의지, 실질적 개입과 개선의 의지가 필요하다. 질병판정위로 할 만큼 했다. 새로운 구조를 당장 논의하기 시작해야 한다. 지체할수록 힘겨워지는 것은 바로 산재보험과 노동조합이 지키고자 했던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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