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와 노웅래 더불어민주당·강은미 정의당 의원실 주최로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열린 제주의료원 산재사건 후속 과제와 대응 토론회에서 조이현주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변호사가 발제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위험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어요. 웨이퍼가 담긴 박스, 수많은 장비에서 냄새가 날 때도 설비 문이 열리며 열기가 느껴질 때도, 그곳에서 사용한 화학물질들이 어떤 영향을 줄지 감히 상상하지 못했어요.”

김성화(가명)씨는 1995년 한 반도체 공장에 입사했다.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곳이었다. 그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반도체 공장에서 오퍼레이터로 10년여간 일한 뒤였다. 2008년 초 임신 7개월째던 그는 의사에게서 아이에게 기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태어난 아이는 왼쪽 신장이 없었다. 선천적 식도 기형도 함께 가지고 태어났다. 김씨는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이는 차가운 수술방에 들어가야 했다”며 “항상 힘들고, 두렵고, 미안해 매일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아이는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또래보다 조금 느린 아이로 자라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현재 산업재해보상 신청을 준비 중이다.

산재 인정까지는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태아의 건강손상이나 출산아의 선천성 질환도 엄마 노동자의 산재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결했지만, 법·제도는 개선되지 않고 있다. 노동·시민·사회단체는 국회에 계류 중인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 개정안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모았다.

“국회, 산재보험법 개정안 처리해야”

공공운수노조와 노조 의료연대본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1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 소교육실에서 대법원 제주의료원 판결 후속과제를 논의하는 대응토론회를 열었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함께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제주의료원에서 일한 간호사 네 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급여신청 반려처분취소 소송 상고심에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줬다. 엄마 노동자의 업무로 인한 태아의 건강손상을 산재보험법으로 보장해 줘야 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입법 공백은 여전하다.

조이현주 변호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는 “업무상 사고나 출퇴근 재해, 업무상 부상이 원인이 돼 발생한 질병이나 근로기준법상 직장내 괴롭힘, 고객의 폭언 등으로 업무상 정신적 스트레스가 원인이 돼 발생한 질병이 태아에게 건강손상을 입혔다고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조이현주 변호사는 “엄마의 업무에 기인해 발생한 태아의 건강손상이 업무상재해가 되는 경우 어떤 보험급여를 청구할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며 법·제도 공백을 지적했다. 산재보험급여 종류는 요양급여·휴업급여·장해급여·간병급여·직업재활급여 등으로 다양한데 이중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적용할 것인지는 법 개정을 통해 명확히 해야 한다는 의미다.

“입법 지연 속 고통은 재해자 몫”

법·제도 공백으로 재해자는 고통받고 있지만 국회는 태평하다. 21대 국회에는 임신한 노동자가 위험 환경에 노출돼 장애 혹은 질병이 있는 태아를 출산한 경우 업무상재해로 인정하고 보험급여를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 산재보험법 개정안 4건이 발의됐지만 모두 고용노동법안심사소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제주의료원 태아 산재 사건을 맡았던 권동희 공인노무사(법률사무소 일과사람)는 “초기에 제대로 치료받을 방법이 없어 서울 한 병원에 내원했는데, (제주에서 오는) 비행기 안 산소호흡기가 마련돼 있지 않아 굉장히 어렵게 병원을 가야 했다”며 “이분이 겪는 어려움들은 현재 급여로 보상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어린이집이 신체적 결함이 있는 아이를 맡으려 하지 않다 보니, 자신이 아이를 돌볼 수밖에 없어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고 재해자 상황을 전했다.

조승규 공인노무사(반올림)는 “반올림에 지금까지 2세 산재에 관한 제보 30여건이 들어왔다”며 “터너증후군·합지증 등 선천성 장애부터 골수이형성증후군·백혈병 등 재해 종류도 다양하다”고 설명했다. 재해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은 업무와 재해의 인과관계 입증이 어렵다는 말과 같다고 설명했다. 조 노무사는 “본인의 질병도 인과관계를 엄밀히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2세 산재는 더 어렵다”며 “입증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덧붙였다.

“생식독성물질 사각지대”

임신 노동자를 유해인자에서 보호하기 위한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현주 우송대 교수(간호학)는 “근로기준법에서는 임신 노동자 금지 업무를 규정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으나 임신 노동자에게 안전한 직장을 조성하도록 사업주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규정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임신 노동자 보호 규정은 유명무실한 상태”라고 지적했다. 근로기준법은 임신 노동자 금지 업무로 방사선 취급업무, 강력한 소음작업, 이상기압, 유기화합물 4종(벤젠, 2-브로모프로판, 아닐린, 페놀) 등이 기재돼 있지만 정작 산업안전보건법상 임신 노동자 보호규정은 없는 상황이다.

생식독성물질에 관한 조사와 규제 강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최인자 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분석팀장은 “노출기준 고시에 따르면 생식독성물질은 44종인데 이 중 작업환경측정 제도 적용 대상 물질은 28종, 특수건강진단 제도 적용 대상 물질은 27종”이라며 “제도적으로 생식독성물질로 구분했지만, 취급 및 노출에 대한 실태 파악은 28종에 불과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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