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

막을 수 있었던 재해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계속 죽어 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사회적 문제의식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으로 모였다. 그 성과로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 지난 1월8일이다. 그리고 1월25일 집권여당 대표가 산업안전보건청을 신설하겠다고 했다. 이미 앞선 기고에서도 밝힌 바 있듯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담고자 했던 바가 현실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입법’ 이후에 구체적인 ‘행정’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행정조직이 필수적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에 발맞춰 노동안전보건 행정조직 개편을 정치권에서 다뤘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에 부응하는 듯 2월22월 고용노동부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산업재해 관련 청문회에 제출한 ‘2021년 산재 사망사고 감축방안’에서 현행 산업안전보건 담당 조직(국 단위)을 확대해 산업안전보건본부를 올해 7월까지 설치해 기능 및 조직을 확충하고 2023년 1월 외청을 독립 출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딱 거기까지였다.

이제 곧 7월이다. 그런데 새로운 노동안전보건 행정조직 개편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것인지 도대체 알 길이 없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전문성·독립성 제고라는 기본방향을 제시했지만 어떠한 경로와 과정으로 그것을 달성할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여당이나 야당이나 진보정당에서나 새로운 안전보건 행정조직 필요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커녕 얄팍한 이해도 발견하기 힘들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느냐는 사회적 논의는 온데간데없이 집권당이 던져 놓은 정치 일정에 따라 산업안전보건청이 만들어질까 우려된다. 그간 한국 사회 노동안전보건 수준 향상을 위해 진정성을 가지고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주장했던 쪽에서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국면을 예측하지 못했고 세부적 실행기획을 내지 못하고 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이러한 호기(好期)를 놓치면 그야말로 정부조직 개편은 물 건너갈 일이며, 공론의 장이니 사회적 합의니 하는 골치 아프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것은 오히려 ‘다된 청에 재 뿌리기’를 할 것이라는 현실적 우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일수록 당위와 현실 사이에서 제대로 중심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정치적 저울질이 아닌 사회적 가치 실현이라는 차원에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당장 사회적 논의의 문을 당장 열라고 주장해야 한다.

영국에서 국가적 차원의 산재예방정책과 철학이 대대적으로 혁신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이다. 당시 영국의 산재 사고사망자는 985명(한국은 2018년 산재사망자가 971명, 2020년에 882명)이었다. 그럼에도 영국은 국가 안전보건 시스템을 철저하게 성찰하기 시작했다. 노동안전보건 제도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됐으며, 2년에 걸쳐서 다양한 현장 담당자와 이해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며 조사하고 논의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 그 유명한 ‘로벤스 보고서(The Robens Report, 원제 Safety and Health at Work)’다. 이를 통해서 ‘공장법(Factory Acts)’을 넘어서서 새로운 ‘산업안전보건법(Health and Safety at Work etc. Act)’을 제정하고, 영국 산업안전보건청(HSE, Health and Safety Executive)을 설립하고 위험성 평가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영국이 산재예방과 노동안전보건 모범국가로 인정받는 것은 국가 차원의 산재예방체계에 대한 심도 있고 면밀한 모색을 통해서 시스템을 구성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기 때문이다.

산재 사고사망자만을 놓고 봐도 50년 전 영국에 비해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 더 낫다고 볼 수 없는 작금의 상황에서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논의가 어떤 방향으로,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게 될 것인지를 잘 살펴야 한다. 산재예방과 노동안전보건정책 집행의 주체이면서도 스스로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노동부 역시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노동부는 예산을 쪼개서 몇 개월짜리 정책연구과제를 발주하고 터무니없는 예산과 연구기간임을 알면서도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연구자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갈아 넣을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한국의 정치풍토, 국회의 입법 행태와 정부 정책결정 과정의 비루함을 반영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1~2년의 시간과 그만큼의 비용을 투자하는 숙의와 합의를 위한 위원회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영국 산업안전보건청(HSE) 통계에 따르면 영국의 2019~2020(1년간) 산재 사고사망자는 111명이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800명의 노동자 목숨을 살리기 위해서는 제도와 정책과 구조를 만드는 데 시간과 비용을 부담해야만 한다. 파편적이지만 한국의 산재예방정책에 대한 많은 비판적 검토가 있고, 관련 법체계 및 집행체계에 대해서도 여러 연구가 있다. 연구자료를 취합하고 현재 상황에 대해서 현장 이해당사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취재하고 총체적으로 다시 분석하고 제대로 된 구조를 짜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새로운 노동안전보건 집행조직체계 구성을 위한 조사연구를 수행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학계와 노·사·정·당을 초월하거나 대표하는 한국판 로벤스위원회 구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주장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산재 예방, 안전과 건강, 생명과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 노와 사 모두 최대한의 전향적 자세를 확약하는 것이 필요하다.

고전적인 굴뚝산업에서 다양하고 복잡다기한 생산방식 변화와 함께 일터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상황에서 시대에 뒤쳐진 산업안전보건청이라는 명칭 고민부터 새로운 노동안전보건 행정기구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당장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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