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진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이태진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노동안전보건부장(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산재할래? 공상할래?

일하다 사고나 근골격계 질병 등으로 치료와 요양이 필요한 노동자들에게 산재를 신청할지 혹은 공상처리를 할지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공상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공상은 법률용어도, 공식적인 용어도 아니다. 공상은 법죄행위인 산재은폐를 조장하는 수단으로 활용이 되고 있다. 회사는 고용노동부에 산재발생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되고, 재해율이 낮게 되면 노동부 감독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법적인 권리인 산재를 왜 포기하는 것일까?

근로복지공단 태도와 업무처리 지연

산재은폐(공상)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신청 지연처리에 따른 고통 대신 회사가 제시한 공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공상처리는 병원비와 임금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회사가 바로 지급해 준다. 반면 근로복지공단으로 넘어간 산재신청 건은 언제 처리가 될지 모른다. 그런 상태에서 재해자가 치료비와 생계비를 최소 3~4개월 자비로 처리해야 하는데 누가 산재신청을 할 수 있겠는가.

산재신청을 하는 이들은 사업주가 정말 악랄해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서 산재신청을 가거나, 자신의 현장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있는 노동자들, 혹은 더 이상 사업주를 안 봐도 되는 노동자들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강순희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산재은폐를 부추기는 업무처리 지연에 대한 반성이나 미안함도 없이 오히려 자신들의 노력과 성과를 알아 달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성과라는 것은 지난 수년간 노동계와 산재피해자들이 공단에 문제를 지적하고 요구하면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강순희 이사장이 생색내고 있는 성과마저도 일선지사에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최근 필자가 한국타이어에서 퇴직한 직업성 암환자 사건을 대리하면서 해당 노동자의 근무이력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 공단에 보험가입자 의견서와 문답서를 요청했다. 그런데 담당자는 사업주 의견서 전체가 아닌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보험가입자 의견서 한 쪽짜리만 사본으로 제공했다.

또다른 사건에서는 재해자가 병원진단서를 첨부해 산재신청을 했는데 공단 담당자는 산재용 소견서가 아니라며 접수를 하지 않았다, 금속노조에서 항의하자 접수는 했지만, 업무처리를 진행하지 않고 계속 재해자에게 산재용 소견서를 받아오도록 종용하는 일도 있었다.

통계의 마법과 노동부

2014년 3월12일까지는 산재발생 보고 대상이 사망 혹은 4일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경우였다가 3일 이상의 휴업으로 바뀌었다. 이는 너무나 큰 차이를 발생시켰다. 병원 진단이 2주 이상이 나오더라도 회사에 출근해서 치료를 받으면 산재발생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결국 팔에 깁스를 한 노동자가 일을 하지 못하더라도 출근도장만 찍으면 산재가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됐다. 2016년 3월16일에는 발생보고 대상을 3일 이상 휴업에서 4일 이상 휴업으로 완화했다. 이를 통해 노동부는 산재발생률을 30% 이상 줄일 수 있는 통계의 마법을 부렸다. 또한 산재발생 1개월 내 미보고시 즉시 처벌에서 ‘노동부가 산재발생을 인지히고 시정 지시 후 15일 이내 제출’하면 처벌하지 않도록 해 대놓고 산재를 은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줬다.

난관을 뚫고 산재발생 신고가 들어오면 노동부는 사업주로부터 산업재해조사표를 보고 받고 있다. 산업재해조사표는 사업장 및 재해자의 고용형태를 포함해서 재해발생의 원인과 대책까지 포함돼 있는 중요한 자료다. 해당 보고서는 노동자대표나 재해자 본인의 서명을 받도록 돼 있지만 대부분 공란으로 보고를 받는 등 관리가 부실하고 데이터베이스조차 구축되지 않았다.

산재를 예방하기 위해선 산재가 온전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기관은 산재를 은폐하고 축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산재예방 정책이 제대로 수립되기 위해서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보험법)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는 행정을 펼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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