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한국사회적경제연대회의에서 사회 은행을 설립하기 위해 본격적인 작업에 나섰다. 사회적 경제 영역의 은행 역할을 할 단체 신협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이다. 신협을 통해 사회적 경제 주체들에게서 자금을 형성하고 그 자금이 사회적 경제 내부에서 순환하도록 만들겠다는 취지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적 금융기관은 정부나 단체의 지원 자금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적 금융을 발전시키자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노동공제운동을 하면서 노동금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지라 그 시도가 여간 반갑지 않다. 사회연대신협 속에 노동금고가 자리 잡을 수도 있고, 또는 사회연대신협 모델을 노동금고가 가져올 수도 있겠다. 이후 방향이 어떠하든 사회연대신협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금융위원회에서 신협의 신규 인가를 좀처럼 해 주지 않는지라 취지가 좋고 계획이 잘 세워졌다고 해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에서 금융은 혈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점은 사회적 경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하는 약속은 많이 들어봤지만,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사회적 금융을 도입하겠다는 약속은 아주 드물게만 접할 수 있다. 혈관이 없이 신체가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 영역은 구조적으로 외부의 수혈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꼴이다. 숨겨진 의도가 있다고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 그래서 사회적경제연대회의가 내디딘 발걸음이 꼭 성공하길 바란다.

연관되지만 약간 다른 이야기로 방향을 돌려보고자 한다. 신용과 신뢰는 표현이 얼핏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의미가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는 신용 제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속으로 성장해 왔다. 재화를 거래할 때 당장 그 대금을 지급하지 않고 나중에 갚아도 되는 시스템, 즉 선구매 후지급 시스템으로 거래의 흐름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신용 거래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신용에는 등급이 있다. 등급이 낮으면 아무리 구매 의지가 강하다 하더라도 구매를 실현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나 신용을 잘 측정할 수 있는가다. 주류 금융체계에서는 산 노동이 아니라 죽은 노동, 즉 축적된 자산이 없으면 신용이 떨어진다. 쉽게 말해 가진 게 없는 사람은 돈을 빌릴 수 없다. 사회적 경제 조직도 마찬가지다. 돈보다는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사회적 경제 조직은 신용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자원이 별로 없다. 심지어 협동조합의 출자금조차 부채로 인식된다.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평가는 아주 인색하게 반영될 뿐이다. 상장 기업의 경우 성장 가능성이 주식 투자자에게 중요한 판단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주류에 편입되지 못하면 그러한 기회조차도 없다.

사회적 경제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돈을 빌려준 기관이 돈을 빌린 조직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지원을 하는 사례를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사례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금융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 경제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신용에 그치지 않고 신뢰가 작동할 수 있는 금융이 필요하다. 신용 체계는 낯선 타인과의 거래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신뢰 체계는 외부인이 아니라 내부인의 관계로 작동한다. 이러한 신뢰에 기반을 둔 금융을 일반적으로는 관계 금융이라고 부른다. 사회적 금융은 대표적인 관계 금융이다.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겠으나 노회찬재단의 사정을 예로 들어 본다. 재단은 올해 자체 건물을 구입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건물 구입을 위해 대출이 불가피해 은행을 통해 가능한 대출 규모와 이자를 알아봤다. 하지만 비영리 공익재단이라는 성격은 은행 대출에 아주 불리하게 작용한다. 대출 가능 규모도 턱없이 부족하거니와 대출 이자도 영리기업보다 아주 높게 책정됐다. 7천명 넘는 회원 규모도 별 소용이 없다. 금융기관에서는 죽은 노동, 즉 축적된 자산으로 신용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 금융이 발달했다면, 이러한 어려움은 겪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매월 들어오는 회원 후원금이 공개돼 있기에 재단은 오히려 더욱 수월하게 대출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아졌으면 한다. 긴급하게 사용되지 않는 자금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그 자금을 은행에 예치해 두지 않고, 신뢰 관계가 형성된 조직에 빌려준다면 서로 도움이 되는 관계가 가능해진다. 금융기관보다 더 높은 수익을 얻으면서도 돈을 빌려준 조직이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사회 은행이 설립돼 이러한 관계 금융을 활성화하기를 기대한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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