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방관자 주문이 부른 죽음

초등학생이 아주 친한 친구가 왕따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했더니 부모는 괜히 나서지 마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살했다는 사례를 듣고 깜짝 놀랐다. 왕따 당하던 당사자는 바로 그 자신이었단다. 부모의 얘기에 아무도 자기 편이 돼 줄 수 없다는 그 아이의 절망감이 얼마나 깊었을까.

유명인들의 학교폭력이 뜨겁고 얼마 전 국회의원의 당직자 폭행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폭력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벌어진 사건으로 생각한다. 그런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함께 있었을 방관자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있다. 학교만이 아니라 사회적 혐오와 폭력들에서 방관자는 공범이며 때로는 가해자가 된다. 방관자 문제는 폭력 방지를 위한 연구와 교육들에서 자주 나온 얘기지만 여전히 강조해야 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얘기는 때론 삶의 지혜였을 것이다. 나 또한 전쟁을 겪은 부모 세대로부터 자주 들었다. “앞서지도 말고 뒷서지도 마라.” 좌우가 서로를 죽였던 끔찍한 경험에서 얻은 처세술을 이렇게 가르치곤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사독재 정권을 겪은 어른들은 이런 태도를 더욱 강조했다. 사석에서 정치 얘기를 자주하는 어른들도 정작 직접적으로 나서는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이곤 했다. 세월은 한참이나 흘렀고 세상도 변했지만 방관자 논리가 작동한다.

“누군가 나서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내가 나서고 싶지 않으니까요.” “내가 나섰다가 불이익을 당할 테니까요.”

동종사에 노조가 생겼지만 노조를 만들지 못한 회사 노동자들이 찾아왔을 때, 왜 여태 노조를 만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누군가 나서 줬으면 좋겠는데 그럴 사람이 없었습니다.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어 노조가 있으면 좋겠다고 수군거리곤 했다는 노동자도 이런 얘기를 했다. 이들에게 용맹스럽게 앞장설 투사나 영웅이 필요할까.

‘괜나당’과 무임승차

무권리 노동 현장에서 “괜히 나섰다가 나만 당할 것”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다 보니 ‘괜나당 심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나당 심리에는 두 가지 우려가 깔려 있다. 하나는 사용자에 대한 공포다. 괜히 나섰다가 징계나 해고를 당할 것이라는 사용자에 대한 우려가 있다. 다른 하나는 동료에 관련된 우려다. 나섰는데 동료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피해 볼 것이라는 우려다.

바로 그 동료들을 방관자로 묶어 두기 위해 단골로 등장하는 대표적 논리의 하나가 ‘무임승차론’이다. 같은 계열사에 노조가 생기자 행여 여기에서도 노조가 생길까 봐 걱정된 회사 관리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노조 있는 데 하고 똑같이 해 줄 텐데 굳이 노조를 만들 필요가 있겠냐”는 얘기를 직원들에게 퍼뜨렸다. 이럴 때마다 우리는 노조가 필요 없는 만큼 알아서 잘해 준다며 “무노조가 아닌 비노조”라던 재벌 대기업의 주장이 떠오르곤 했다.

무임승차론이 전형적 방관자 이데올로기다. 무임승차라고 하면 편하게 이익을 누릴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방관자론’으로 볼 때 문제가 더 정확히 드러난다. 직장 동료들이, 같은 노동시민들이 노조를 만들었는데 이를 방관하도록 만드는 논리는 타인이 아닌 내 권리를 남의 일로 생각하게 한다. 노조가 생기는 과정에서 방관자 논리에 갇힌 사람들은 동료와 자신의 권리에 거리를 두다가 억압자의 공범이 되곤 한다. 민주노조가 들어서면 친회사 노조로 대응하는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노조를 만든 후 조합원들은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노조원을 “비노” 혹은 글자 순서를 뒤집어 “노비”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존엄과 권리를 위해 노조를 만들었음에도 타인을 조롱하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비조합원 차별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조합원인 내가 좀 더 이익을 누려야 한다는 것, 비조합원에게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임승차론’이나 ‘무임승차 차별론’이나 자기 이익 중심이다. 차별에 맞서 노조를 만든 사람들이 차별 유포자가 될 수도 있다. 노조를 만드는 과정이 권리 자각이 아닌 억눌린 이익욕망을 확장하는 과정에 불과할 때, 이런 일이 더 생긴다.

이재용 부회장이 중요할까

정부·여당이 힘을 잃고 이재용 부회장 사면론이 부쩍 떠오른다. 재계를 상징하는 인물이자 최대 재벌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비판과 옹호가 강력하게 교차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처벌과 사면이 갖는 상징성과 영향력이 크다. 나는 재벌에 대한 선망도 원망도 별로 없다. 이런 선망과 원망들이 평범한 시민들과 무권리 노동시민의 자력화를 위한 핵심 에너지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힌 후에는 더 관심이 떨어졌다.

무서운 권력기관의 감시를 받는 시대가 아니기에 대통령 욕하기는 쉽다. 그러나 직장에서 사장이나 회장을 비판하는 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 관계에 노출되는 일이고,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밀접한 관계로부터 모종의 리액션이 돌아온다는 것, 그것이 밥줄을 위험하게 할 불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 정치권력 비판자는 차고 넘치지만 시장권력에 대한 방관자를 만드는 하나의 이유다.

그만큼 어려운 회장이나 사장 비판에 나선 직원들의 용기를 높이 산다. 그러나 노조를 만들려고 하는데 그런 비판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 그것이 과연 상황을 바꾸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타인을 비판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비판해야 하는 어려움, 스스로를 성찰하는 고통에 직면하기 때문에 더더욱 타자 비판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무노조 재벌그룹과 맞서 온 때부터 계속된 질문이다.

옆 사람과 ‘다나당’

직원을 몇 등급으로 나누고 상위 등급에겐 상을, 하위등급에게 불이익을 주는 인사노무관리체계는 어떻게 유지되고 극복될 수 있을까. 이런 경쟁제일주의가 개인의 심리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늘 불이익을 받는 소수 동료의 불이익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이룬 성과를 어떻게 봐야 할까. 일부를 지속적으로 희생시키며 성과를 유지하는 기업을 보면서 공동수탈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다수의 직원을 방관자와 공동수탈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기업의 회장을 처벌하면 그곳에 깊게 박힌 문화가 금방 바뀔까. 늘 구성원의 집단적 각성 없는 변화는 불가능했거나 지속되지 않았다.

방관자 육성은 공감을 차단하고 성찰을 막는다. 설혹 그런 기업들에서 더 많은 성과급을 바라며 노조를 만든다고 해도 스스로들이 유지해 온 시스템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수년간 뼛속 깊이 체험했다. 이런 곳에 필요한 사람은 관리시스템에서 길러 내는 우월감과 잘 구분되지 않는 심리로 무장한 투사나, 혹은 너무 많은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될 영웅이 아니다. 바로 곁에서 상호작용을 통해 성찰과 공감을 일으키는 촉진자가 소중하다.

‘괜나당 심리’에 스며 있는 사용자에 대한 공포와 방관자가 될 수도 있는 동료에 대한 걱정을 해결하는 열쇠는 옆 사람이다. 무노조 기업에서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은 옆의 동료들이 공감하고 동참한 때다. 그것은 단지 방관자들에 둘러싸인 고립감을 깨뜨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불이익을 던져 줄 사용자에 대한 공포까지 극복함으로써 권리 주인이 되는 자신감을 얻는 열쇠다. 다수가 모이면 사용자는 함부로 공격할 수 없고 그들의 권력은 무력하다.

소수자 인권이나 노조할 권리는 법이나 정치권력이나 빼어난 선구자들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동료 노동시민의 공감과 참여를 핵심 에너지로 실현된다. 전위투사나 영웅보다 더 강력한 힘은 바로 옆 사람이다. 다 같이 나서면 당하지 않는다. 다 함께 나서면 당당하다.(줄여서 ‘다나당’) 그래서 나는 ‘괜나당’이 아니라 언제나 ‘다나당’을 지지한다. 먼 유명인의 팬이 되는 것도 좋지만 옆 사람에게 좀 더 충실한 팬이 되자.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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