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주말에 편한 시간을 내어 봉제인공제회 운영위원들이 모였다. 조합원을 확대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자고 마련한 자리였다. 현재 조합원은 203명으로 공제회를 막 시작했을 때보다 4배가량 늘었다. 올해 안에 500명을 만들어 보자고 결심하고 만든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봉제노동자들에게 선물을 한다면 무엇을 가장 원할까 물어봤다.

구찌 가위(주머니를 따거나 모서리를 자를 때 편하게 사용하도록 가위날을 짧게 만든 가위)일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몸을 꾸미거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일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지만 자신의 것으로 가지고 싶은 물건이 가장 먼저 제시됐다.

6411번 버스를 탄 노동자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시나요?”라고 물으면 “대단한 게 있나요, 그저 지금 하는 일만 계속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번듯한 집 한 채 생겼으면 좋겠어”라는 대답을 들어본 적은 없다. 그저 현재 가진 일자리가 없어지지 않고 소박한 삶이라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어보면 그 희망의 범위는 아주 한정적이다. 욕심도 내어 본 사람이 내는 것이니까.

정치를 포함해 운동은 그 가운데에서 욕망을 찾고 드러내려 했다. 현실의 삶은 외피일 뿐, 진정한 가치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숨겨진 욕망을 꺼내어 요구로 만들고 또 이를 집단적 힘으로 만들어 세상을 바꾸려 했다. 그렇게 가정된 욕망은 큰 담론으로 만들어지고, 또 운동은 그 담론을 중심으로 굴러갔다.

하지만 그 큰 담론을 쫓아간 건 운동의 엘리트들이었다. 이 담론은 엘리트들의 욕망이 됐다. 이 담론에는 처음 만들어질 때 지니고 있었던 피와 살이 사라졌다. 피와 살을 가진 노동자들에게는 여전히 구체적인 현실만 남아 있다. 6411번 버스를 타고, 재봉틀을 돌리는 노년의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 몸 누일 수 있는 따뜻한 방 한 칸이요, 편하게 실을 끊을 수 있는 구찌 가위다.

한 사회가 노동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보려면 평생을 묵묵히 한 가지 일만을 해 온 노동자가 어느 만큼 사회적으로 지지받고 인정받는지를 보면 된다. 40년의 세월을 큰 욕심 내지 않고 그저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열심히 재봉틀을 돌려 온 노동자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수준이다. 어떤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이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관념일 뿐이다.

어느 정치인이 6411번 버스를 타게 된다면, 타면 탈수록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 횟수는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6411번 버스를 타는 것이 자신의 진심을 나타내는 행위로 포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행위여야 한다. 그건 ‘6411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노회찬재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기성 정치인들을 욕하려는 게 아니다. 진보운동에 몸담았던 수많은 이들이 기성의 정치로 다 휩쓸려간 마당이니 누구를 욕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은 누구를 탓하기 전에 모두에게 큰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사물을 추상화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이 진화할 수 있었던 가장 큰 강점이었지만, 그러는 중에 삶의 내밀함을 살필 수 있는 능력이 퇴화했다면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세상을 끝낼 수 있을 듯 최고의 언어를 쏟아낸 뒤 공허함이 생긴다면 그 말에 살과 피가 없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관성처럼 센 말을 쏟아내고는 그 말들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착각을 한다.

영화 <인셉션>에서는 자신이 현실의 공간에 있는지 가상의 공간에 있는지 분간하기 위해서 팽이를 돌려본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팽이가 멈추면 현실의 공간이고, 끝없이 돌면 가상의 시공간이다. 사회적 가치를 중심으로 우리가 어느 현실에 있는지 보려면 6411 투명인간들의 삶을 살펴보면 된다. 그들의 삶이 십 년 전보다 얼마나 나아졌는가. 그들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느 만큼 인정받는가.

6411로 표현돼야 할 삶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6411로 표현함으로써 우리의 눈이 더 밝아지게 됐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든, 장애인이든, 여성이든, 알바와 배달노동자든 사회적 삶의 지표로 봐야 할 수많은 소수자가 있다. 그 삶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회적 지표다. 어느새 큰 꿈도 없고 작은 배려도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소박한 희망에서 다시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할 때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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