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충북 충주시 한 원룸에서 인터넷 설치기사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있었다. 기사를 살해한 사람은 그를 부른 고객이었다. 인터넷 속도가 느린 것에 불만을 품어 오다 점검하러 찾아온 기사를 살해한 것이다. 경찰 수사에서 망상장애를 앓는 것으로 드러난 그는 “인터넷 수리를 위해 집에 누가 오든 살해하려고 마음먹었다”고 진술했다.

인터넷 수리기사처럼 고객의 집을 방문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구방문 노동자 10명 중 7명은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정훼손 경험은 건강상 문제로 이어졌다. 이들 중 41%가 ‘자살’을 떠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감정노동 강도 높을수록 자살충동 경향 커져”

국가인권위원회는 8일 ‘가구방문 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인권위는 “고객의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주로 혼자 일해야 하는 노동 속성과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모두 가진 가구방문 노동자들은 과도한 폭언과 성희롱에 노출돼 건강권과 안전권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인권위의 연구용역을 받은 한국비정규노동센터는 지난해 4월부터 10월까지 가구방문 노동자 노동자 796명을 실태조사했다. 조사대상 직종은 통신설치 및 수리기사·가스안전 점검원·상수도계량기 검침원·재가요양보호사·방문간호사·다문화가족 방문교육지도사·통합사례관리사다.

조사결과 74.2%가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경험했다. △괴롭힘 목적의 늦은 전화(48.8%) △늦은 밤시간 업무 요구(47.2%) △사업주 또는 직장에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43.4%)가 가장 많았다. △신체적 폭력(25.9%) △성희롱이나 성추행(22.1%)을 경험한 방문노동자도 10명 중 2명꼴로 나타났다.

그 결과 방문노동자 10명 중 4명이 극단적 선택을 생각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업종별로는 통신 설치 및 수리기사(49.8%)·재가요양보호사(45.5%)·계기 검침원(36.7%)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최근 1년 간 자살을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는 방문 노동자 역시 전체의 20.3%를 차지했다.

인권위는 “방문노동자들이 고객이나 직장에서 경험하는 부당대우 빈도가 높고 그 종류가 많을수록 자살 충동 경향성도 높아졌다”며 “감정노동이 방문노동자의 정신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고객과 업체로부터 부당대우를 없애는 방안과 함께 부당대우에 노출된 노동자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는 제도적 보호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업무공간 특성상 문제제기도 어려워

인권위는 “방문노동자들은 업종별로 조금씩 편차가 있지만 제공하는 서비스 내용과 무관하게 보편적인 인권침해를 겪고 있었고 부당대우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는 불안정한 고용 지위 때문이다.

방문노동자 2명 중 1명은 위탁·하청노동자거나 학습지 교사·가사노동자·검침원같이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이다.

이번 조사 대상자의 월평균 임금은 206만원으로, 최저임금 미만자가 21.5%를 차지했다. 특히 시간당 임금과 월평균 임금이 낮은 재가요양보호사와 다문화가정 방문교육지도사·통합사례관리사 같은 돌봄노동자들은 ‘투잡’·‘스리잡’을 뛰는 경우가 40~70%에 달했다.

감정노동자 보호를 위한 법·제도적 장치가 방문노동자들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고객응대 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업무의 일시적 중단 등의 조치를 요구할 권리’를 보장한다. 하지만 방문노동자들은 가정이라는 폐쇄적이고 사적인 공간에서 1대 1로 고객과 만나는 경우가 많아 사업주에 곧바로 조치를 요구하기가 어렵다. 또 업무 중 사고를 당해도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아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일이 적지 않다.

연구진은 방문노동자 규모가 80만명을 상회할 것으로 추정했지만 정확한 실태 파악이 힘들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사회복지 확대로 가구방문 공공서비스 노동자 규모가 빠르게 확산하고 민간부문 역시 고객만족 극대화 전략에 따라 홈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가 증가세에 있다”며 “실태조사 결과와 전문가 및 관계부처와의 논의 내용을 검토해 향후 방문노동자들이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법·제도 개선 방안을 모색하고,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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