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자 서구 언론들은 바이러스를 위대한 균형자(the great equalizer)라고 불렀다. 부자나 유명인에서부터 수상과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감염시키는 바이러스야 말로 빈부와 권력의 격차조차 무시하는 궁극의 평등유발자, 이퀄라이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곧 코로나 바이러스는 어마어마한 불균형자(the great unequalizer)임이 드러났다. 바이러스는 대상을 가리지 않을지 몰라도 감염의 결과는 소외된 이들에게 치명적이었으며, 노출 위험도 힘없는 이들에게 더 높았다. 감염되지 않았더라도 생계의 중단으로 위협을 받는 것도, 혹은 위험을 무릅쓴 노동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힘없는 이들이었다. 오로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유일한 방역 대책이었던 시기를 지탱해왔던 것 역시 그들이었다. 한때 필수노동자를 치켜세우고 온갖 사회적 지원을 다 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신이 개발되고 이제 언론은 필수노동자가 어떤 지원과 보호를 받는가보다는 대통령이 어떤 백신을 맞았는지가 더 중요할 따름이다.

올 3월에 알려진 것만으로도 2명의 택배 노동자가 사망했다. 심야·새벽 배송 업무를 담당하거나, 주6일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했던 택배 노동자들이었다. 3월30일 기준 지금까지 국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사망자 중 40대는 14명, 30대는 7명이다. 코로나 방역을 위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지탱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노동과정에서 사망한 30~40대 노동자들은 얼마나 될 것인가. 지난해만 16명의 택배 노동자 과로 추정 사망이 알려졌고 올해도 잇따르고 있으니, 오로지 택배와 물류 노동자들만으로도 그와 비슷한 숫자로 사망했거나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가히 죽음의 행렬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이미 지난해 11월에도 바로 이 지면에서 했다. 달라진 것은 없다. 같은 기업에서 같은 업무를 하는 또 다른 노동자가 죽어 나간다. 멈춰야만 한다.

산업안전보건법 제55조 1항에 따르면 고용노동부 장관은 중대재해가 발생하였을 때 해당 사업장에 산업재해가 다시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중대재해가 발생한 해당 작업이나 중대재해가 발생한 작업과 동일한 작업의 중지를 명할 수 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시행규칙에서 규정하는 중대재해는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동시에 2명 이상 발생한 재해, 부상자 또는 직업성 질병자가 동시에 10명 이상 발생한 재해를 말한다. 택배·물류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이 중대재해가 아닐 리 없다. 연이은 사망은 ‘해당 사업장에 산업재해가 다시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명백한 근거다.

휴대폰 부품공장에서 메탄올 중독으로 파견노동자들이 실명한 사례에서처럼 노동부는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업장에 대해 작업중지명령을 내리거나 특별근로감독을 할 수 있다. 특별근로감독에서 법 위반 사항을 적발하면 시정 명령 및 작업중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있다. 노동부의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작업중지의 범위·해제절차 운영기준’에 따르면 사업주가 재해를 유발한 유해·위험요인뿐 아니라 안전보건관리체제 등 관리적 사항을 점검해 추가 유해·위험요인을 발굴하고 개선조치를 하는 것을 전제로 작업중지를 해제하도록 하고 있다. 필수노동자들에 대한 지원, 위험수당의 문제보다 당장 시급한 문제는 이 위험한 죽음의 물류 시스템을 제어하는 것이다. 아침 찬거리를 저녁에 주문해서 새벽에 문 앞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일을, 야간배송을 중단한다고 해도 기업의 이윤이 줄어들지언정 사회가 멈출 리 없다. 노동자의 사망이 업무와 관련한 것이 아니라는 기업 측의 변명만 받아든 채로 죽음의 원인을 찾고 교정하지 않는다면 죽음은 이어질 것이다.

작업중지 명령이라는 것이 법에 근거한 이야기일지라도 법에 무지한 의사가 법 해석을 잘못했다는 지적이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막무가내 주장이라는 비판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코로나 방역을 위해 감염병예방법에 근거해서 보건복지부 장관, 질병관리청장, 각 지자체장이 온갖 행정명령을 내리지 않았는가. 마스크를 안 쓰면 처벌하고 집회나 사적 모임을 금지하거나 제한하고 각종 시설과 사업장의 문을 닫게 하고 영업시간을 제한하고 있다.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이다. 이윤과 생명 중 무엇이 중한가의 문제일 뿐이다. 코로나 대유행 시기에 정부가 행정명령의 수위를 놓고 경기 위축 등을 이유로 국민적 합의 혹은 타협을 두고 우왕좌왕 눈치를 볼 때 관련 전문가들이 질타했다. 국민의 생명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느냐고. 택배노동자들의 잇따른 과로사에 대한 대책 역시 사회적 ‘합의’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자들은 탈진과 죽음의 경계에 선 필사의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이 다른가. 노동자들의 생명은 합의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정부와 노동부는 당장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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