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폭우에 홍수 경보까지 내렸던 지난밤의 밀포드 사운드에서 빠져나와 뉴질랜드 남섬의 동쪽 해안을 돌아보기 위해 차를 몰았다. 서쪽 끝인 밀포드 사운드에서 동쪽 끝인 인버카길까지는 300킬로미터는 족히 되는 길이라 캠핑카로 한달음에 가려면 사실상 하루를 다 써야만 한다. 하루 종일 덜덜거리는 캠핑카를 타고 옮겨 다닌다는 건 그리 추천할 만한 여행 방법은 아니다. 13년 전, 아직 30대였던 나라면 당연히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우면서 반나절 만에 이 길을 돌파했을 테다. 하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인버카길보다 황천길에 먼저 오를 수 있는 나이가 돼 버렸다. 슬프지만 여행은 늙어 가는 여행자에게 그 속도에 맞는 발견의 즐거움을 주니 너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나이와 성질에 맞게 움직이되, 욕심내지 말고 중간쯤에서 하루를 끊어 가는 쪽을 추천한다.

남섬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옮겨 가는 길 중간 즈음에 ‘럼스던’이라는 작은 마을이 하나 있다. 지도에서 보면 그야말로 사통팔달에 딱하고 자리 잡은 곳이다. 우리로 따지면 천안삼거리 같은 곳. 기차가 대세였던 증기시대에는 꽤나 번성했을 법한 동네다. 마을은 사거리 하나를 중심으로 몇 블록이 다인 곳이다. 번듯한 상가도 없고, 타운이라고 할 것도 딱히 없는 정말 조용한 시골 마을. 그 사거리에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차역 하나가 남아 있었다. 기차역 주변으로 카페와 빵집·편의점·주유소가 하나씩 딱 필요한 만큼만 있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이 기차역이 심상치가 않다. 기차도 안 다니는 이 기차역은 ‘프리덤 캠핑파크’라는 이름의 공짜 캠핑파크로 변신해 운영되고 있었다. 지역주민들이 지역 경제를 살려 보겠다고 힘을 모아 폐기차역을 리모델링한 모양이었다. 넓은 주차장과 식사를 할 수 있는 탁자들은 물론이고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화장실과 샤워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캠핑카를 타고 다니다가 이런 곳을 만나면 월척이라도 낚은 듯 소리를 지르게 되는데, 이곳은 그중에서도 초대형 다랑어급이었다. 하루 앞서 이곳에 묵었던 다른 차의 일행들이 하도 호들갑을 떨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무인세탁기와 건조기까지 갖춰져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의 호들갑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럼스던 프리 캠핑장의 가장 큰 비밀은 캠핑장 바로 길 건너에 있는 무인 주유소에 있었다.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기에 문 닫은 주유소인가 싶었지만, 그건 눈속임이었다. 몇 번의 진땀나는 시행착오 끝에 주유를 끝내고 영수증에 찍힌 30%나 싼 기름값을 보고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거짓말 좀 보태서 땅 밑에 유전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남섬 곳곳에 무료 캠핑장이 있지만 이렇게 완벽한 무료 캠핑장을 만나기는 어렵다. 몇 년 전만 해도 (여행자식의 ‘라떼는 말이야’다.) 공용 주차장이나 갓길, 한적한 호숫가 등지에서 자유롭게 차를 세워 두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지만, 요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여행지로서 이름값이 높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빡빡해지고 있어 정식 캠핑장이 아니면 밤을 보내는 일이 제한되는 곳이 많아졌다.

서해안에서 아서스 패스로 들어가는 삼거리인 쿠마라 정션에 위치한 ‘Honey Cafe & Honey Center’도 제법 괜찮은 무료 캠핑장이었다. 카페 주인은 말농장 뷰를 앞에 둔 넓직한 카페 주차장을 캠퍼들에게 내주고는 아침 일찍부터 카페를 열어 캠퍼들에게 가성비 좋은 아침식사를 팔고 있었다. 물론 사 먹지 않아도 그만이다. 화장실과 샤워장을 쓸 수 없다는 약점이 있지만, 큰 일을 보지 않고 하루쯤 물티슈로 세수하는 일을 견딜 수 있는 여행자에겐 일도 아니다. 공짜 캠핑장에서 아낀 50-60달러가 다음날의 사치로 이어질 수 있으니 개이득인 셈이다. 하나 조심해야 할 일은 이런 캠핑장들은 전기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짜까지는 아니지만 싸게 이용할 수 있는 캠핑장으로는 뉴질랜드 자연보호국(DOC)에서 직접 운영하는 캠핑장들이 있다. 가격은 위치나 시설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그래도 사설 캠핑장에 비하면 절반 정도밖에 하지 않는다. 자연보호국 캠핑장은 위치가 깡패인 곳이 많다. 우리나라 산림청의 휴양림을 생각해 보면 위치가 깡패라는 말은 쉽게 이해될 것 같다. 시설은 정말 안습인 곳이 많다. 푸세식에 가까운 수세식 화장실은 물론이고, 한 번 물리면 일주일은 지독한 가려움과 싸워야 하는 샌드플라이들의 공습을 두려워해야 하는 샤워장까지 각오해야 한다. 화장실과 조리시설을 다 갖춘 캠핑카 이용자라면 두려움 없이 이용할 수 있다. 예약이 안 되고, 선착순인 곳이 많다는 건 단점일지 장점일지 복불복이다.

시설과 가격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다면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캠핑장을 찾아보는 게 좋다. 유명한 관광지를 벗어나기만 하면 이런 아담한 캠핑장들을 한 군데는 찾아낼 수 있다. 가격보다는 시설과 안전함이 중요한 캠퍼라면 대표적인 기업형 캠핑장인 ‘TOP 10’ 홀리데이 파크를 이용하는 게 좋다. 물론 유료 회원으로 가입해서 할인받는 건 필수에 가깝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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