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병길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지난 7일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도보행진이 청와대 앞에서 마무리됐다. 그는 어용노조 문제를 폭로하다가 국가 폭력에 희생되고 부당하게 해고당했다. 지난 36년간 해고노동자로 살면서 치열하게 투쟁해 왔다. 2009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그의 복직을 권고했다. 그를 해고한 한진중공업은, 그리고 그의 복직을 외면한 정부는 그가 노동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부당해고를 당했다는 사실이, 그의 36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여전히 용접공이다. 그의 말처럼 복직 없인 정년도 없다. 그의 삶을 보면서 노동자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자 할 때 흔히 사전을 펼쳐 든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책은 “일정한 목적, 내용, 체재에 맞추어 사상·감정·지식 따위를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해 적거나 인쇄해 묶어 놓은 것”이다. 이건 책의 정의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책은 정의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물 및 인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쓰임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집에 강도가 들었다면 책은 무기가 될 수 있고, 공부 중에 잠이 올 때는 베개가 되기도 한다.

인간은 사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스스로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다. 누군가를 한마디 말로 정의하는 건 불가능하다. 무수한 선택이 만들어 내는 무수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무수한 얼굴을 지닌 채 살아간다. 한 인간의 죽음이 작은 우주의 소멸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작은 우주를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인간이 경이롭고 소중한 이유다.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일터다. 그곳에서 밥벌이를 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자아를 실현한다. 한 인간의 실존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노동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노동이 바로 서지 않으면 삶 역시 바로 설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으로 노동자임을 판단하려고 애쓴다. 불행히도 법이 판단하는 노동자는 너무나도 협소하다. 법은 사용종속성(사용자의 지시·통제 여부)만을 따진다. 경제종속성(사용업체에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정도), 조직종속성(사용업체 업무에 통합 정도) 등 노동자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그 결과 비정규 노동자는 오랫동안 진짜 사용자가 누군지도 모르거나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라고 불리지 못하며 고통받고 있다. 고용보험·산재보험 같은 최소한의 안전망에서마저 배제된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법의 게으름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독한 현실이다.

노동자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하루하루의 노동 속에 있다. 졸린 눈으로 일어나 지친 몸을 이끌고 버스나 전철에 몸을 싣는 것으로 시작해서, 노동하고, 식사하고, 쉬고, 다시 노동하고, 웃고, 고민하고, 좌절하고, 저무는 해와 함께 퇴근하는 모든 시간이, 그 속에서 맺는 모든 관계가 바로 노동자를 드러낸다. 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노동자는 계속해서 자신을 만들어 나간다. 고 노회찬 의원이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노동을 이야기하며 6411번 버스를 언급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6411번 버스에는 살아 숨 쉬는 노동자가 타고 있다.

노동자란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답은 부조리에 맞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자립된 삶 속에도 있다. 알베르 카뮈는 삶은 부조리로 가득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에 저항하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저항하는 노동자는 기계가, 장부상의 추상화된 숫자가 되길 거부한다. 동료와 함께 외치고, 행동하며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노동의 가치, 타인과의 연대, 자유의 의미, 인간 생명의 고귀함 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노동자는 노동자가 된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상임활동가 (ilecd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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