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일, 백기완 선생님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저 1980년대 중반 전두환 군사정권 아래서 쩌렁쩌렁 울리던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딸 ‘담’에게 보낸 옥중편지를 엮은 책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읽으면서 눈물을 훔치던 내 청춘의 기억도 튀어나왔다. 그 당시 운동노선을 두고서 자못 치열하던 청년의 사투를, 행동에 나서지 않는 비겁자의 망설임으로 보이게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던 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강연회장은 군사정권 타도를 위한 출정식장이 됐다. 우리는 노래가 된 그의 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부르며 어깨동무한 채 파쇼의 세상을 끝장내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10년, 20년, 30년이 갔다. 이제 다시 10년이 가고 있고, 50대였던 그도 갔다. 어느새 나도 50대를 지나가고 있는데, 오늘 이렇게 그의 부고에 지나가 버린 청춘을 ‘새롭다’ 하고 있다.
 

▲ 김기덕 변호사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2. 향년 89세의 생애를 정리한 뉴스 기사를 읽었다. 농민운동과 빈민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앞장서 온 ‘투사 백기완’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있었다. 읽었어도 새롭지 않았다. 익히 알고 있는 것을 기사에서 다시 읽은 거였다. 그만큼 투사로서 그는 한국현대사에서 주요 투쟁 현장에 있었고, 그 소식이 뉴스로 보도됐다. 나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그의 모습을 찾아서 읽어 봤다. 생애의 후반은 노동운동과 함께하고 있었다. 기륭전자 여성 비정규직, 쌍용차,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유성기업, 콜트·콜텍,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희망버스 운동 등 근래 전개된 노동자의 주요 투쟁 현장에서 언제나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있었다. 병상에서 쓴 그의 마지막 글귀도 36년 전 해고 당한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촉구하며 ‘김진숙 힘내라’였다. 생각해 봤다. 정치인을 비롯해서 유명인사들이 제 나름대로 추모의 말을 해서 그것이 기사로 쏟아지고 있는 오늘, 나는 이런 노동운동에서 자취를 쫓아 생각해 봤다. 이러저런 말로 그의 생애를 말하면서 뜻을 잇겠다고 추모하고 있는 오늘, 그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뜻을 새겨 보기 위해서.

3. 기륭전자 투쟁은 2008년 무렵 사내협력업체 소속으로 노동자를 고용해서 사용하다가 노조가 조직돼 투쟁하자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등으로 탄압하면서 장기간 투쟁으로 전개됐다. 초기부터 노조활동을 법적 자문하고 노조 간부 및 해고노동자들을 대리해서 민형사사건을 수행했던 터라 나는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백기완은 기륭전자 비정규직 해고자들이 부당해고 투쟁을 하던 농성현장을 지지방문했다. 기륭전자 투쟁은 기나긴 간접고용 방식의 불법파견 철폐 투쟁이었다. 김소연 지회장 등이 크레인 농성까지 전개하고서 1천895일만에 투쟁을 마무리했던, 그야말로 장기간 노동자투쟁이었다. 사실 이 기륭전자 투쟁은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의 투쟁과 마찬가지로 사내협력업체를 통해 간접고용하는 불법파견을 철폐하자는 투쟁이었다. 단지, 원청 사업장 규모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인 것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안타깝지만 장기간에 걸쳐 투쟁했음에도 현대·기아차에서와는 달리 원청 노동자 지위까지는 쟁취하지 못했다.

현대·기아차 비정규직의 투쟁은 2010년 7월 최병승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로 되살아났다. 현대차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과 그 활동을 역시 그 초기부터 자문하고 불법파견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변호사로서 대리했던 터라 최병승 판결은 누구보다 반가웠다. 이후 현대·기아차에서 비정규직노조 조직화로 본격화할 수 있었다. 2013년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 최병승이 울산공장 송전탑에 올라 농성투쟁하고, 이에 연대해서 희망버스가 출발했을 때에도 백기완은 울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불법파견 철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외쳤다. 이렇게 그는 간접고용·불법파견 철폐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투쟁의 현장에 함께 했다. 이뿐이 아니었다.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를 위해 해고자 김진숙이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일 때에는 희망버스에 참여해서 ‘일어나자, 일어나 이 밤을 뚫자’라는 피 끓는 벽시를 띄우기도 했다. 그리고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 해결 촉구 투쟁에도 함께 했다. 그러니 노동자 정리해고에 반대하는 것, 노동자를 정리해고하는 세상에 반대해서 투쟁하는 것이 그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유성기업은 직장폐쇄와 용역투입으로 사용자가 노조활동을 탄압해서 이에 맞서는 투쟁이었는데, 그 투쟁 현장을 지지방문해 격려했다. 콜트·콜텍의 경우는 해외공장을 건설하고서 국내 공장을 폐쇄해서 노동자들을 내쫓았기에 부당해고 투쟁을 전개했던 것인데 역시 그 투쟁 현장을 방문해서 지지했다.

이렇게 노동자투쟁을 지지했던 그의 마지막 자취를 읽다 보면, 이 세상에서 사용자 자본으로부터 비정규직으로 사용당하고 노동자들이 해고되고 노조활동을 탄압받는 것이 부당하다고, 이런 세상이 부당하다고 노동자들과 함께 분명히 외치고 있었다. ‘노나메기 세상’, 즉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래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착하고 어질고 깨끗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을 꿈꿨다고 민주노총은 조합원들에게 선생님의 부고를 전하고 있는데, 그가 꿈꾼 ‘노나메기 세상’이야말로 위와 같은 마지막 10여년의 생애를 통해 보면 비정규직 없고, 노동자 해고 없고, 노조 탄압 없는 세상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4. 그런데 얼마나 먼 일인가.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타령하는 내게는 얼마나 멀리 있는 말인가. 그의 목소리에 터져 나갈 듯이 심장을 붉게 뛰며 뛰쳐나가던 청춘은 가고, 이제 실정의 노동법을 따져가며 미시적 자유와 권리만 노동자를 위해 법정에서 떠벌이고 있다. 노동자 세상을 떠들어대며 거시적 자유와 권리를 노래하던 그때를 옛날로 추억한 채 법의 숲을 헤매고 있다. 솔직히 말하겠다. ‘노나메기 세상’이라니, 오늘 내겐 분명 꿈꿀 수는 있어도 현실의 꿈은 아닌 게다. 이런 내겐 백기완은 언제나 청년이다. 그는 청년으로 죽었다. 마지막까지도 노동자투쟁 현장에 함께하면서 노나메기 세상을 꿈꾼 그야말로 죽는 순간까지도 청년이었다. 청년 백기완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가. 운동은 늙고, 점점 미시적으로만 노래하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나가자던 거대하던 맹세도 없이 오늘도 노동운동은 가고 있다. 이 나라 대한민국만이 아니다. 노동자 세상을 위한 거대한 운동은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제는 빛바랜 포스터가 됐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하고 보니 조금은 주제넘다는 생각이 든다. 뭐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거냐고 비난해도 할 말은 없다. 비난을 감수할 각오로 끄적거리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주제넘어도, 백기완 선생님의 부고를 전하는 이 나라 노동운동의 심정으로 한마디 하고 싶었다. 청춘을 격동시켰던 이의 거대한 부고에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서 그만 나는 횡설수설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당장은 아니라도 이 세상에서, 이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어쩔 수 없이 노나메기 세상을 꿈꿀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러니 오늘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은 거대한 꿈을 꿔야 하는 것이겠다. 그 꿈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오늘 노동운동은 늙었다고 솔직히 말해야 한다. 그저 어제의 노동운동이 쟁취했던 노동자 권리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새로운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고 말이다.

5. 이렇게 쓰고 보니 한없이 가볍고 보잘것없어 자책만 밀려온다. 나는 어떤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가져왔던 것일까. 오로지 노동자만을 대리하며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활동해 왔다는 것은, 그저 변명일 뿐이라고, 백기완 선생님의 부고 앞에서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자유는, 노동자가 단결해서 활동할 자유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실정법에 의해 규제받아 빼앗기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여전히 노조 등으로 단결해서 파업 등으로 집단적으로 일하지 않는 것조차 국가권력에 의해 형사처벌 당하는 등 민형사책임을 받고 있다. 그런데도 그저 그 법에 따라 노동자의 자유를 나는 법정에서 변론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주 40시간으로 규정한 법정근로시간이 기능하지 못하도록 연장근로를 통해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이 법정근로시간을 일하면 지급받을 임금조차도 고정성 결여 운운하면서 제외시키는 통상임금법리를 통해 법원의 판례로 보장하는 등으로 빼앗고 있다. 이렇게 근로시간 및 임금 등 각종 노동자 권리를 제도적으로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노동자 권리 타령하는 나는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고백하고 보니, 아직 내가 할 일이 많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비록 거대한 꿈을 꾸지 못할지라도 내가 할 일은 많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서 그 다짐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노래를 하게 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다짐을 노래하게 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