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분단체제와 군부독재에 맞서 통일운동·민주화운동에 일생을 헌신하고, 싸우는 노동자·민중의 곁에 함께 섰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새벽 영면했다. 향년 89세다.

황해도 은율군 출신으로 4남2녀 중 넷째였던 그는 해방 뒤인 1946년 열세 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내려왔다. 어머니와 큰형·누나는 북에 남았다. 분단으로 가족과 떨어진 그는 1952년께부터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고, 도시빈민운동과 농민운동 등을 하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20대 청년시절부터 사회운동 … 평생 가시밭길

1960년 4·19 민주혁명에 함께했고, 이후 굴욕적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하며 구속돼 고초를 겪었다. 60년대 후반부터는 박정희 군부독재 타도를 위한 야권통합운동에 전념했다. 1972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열었고, 이는 1984년 탄생한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가 됐다.

1974년 유신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장준하와 그는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가까웠다. 박정희 사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신군부 계획에 반발하며 1979년 서울 YWCA회관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직선제 요구 시위를 개최한 이유로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다리가 꺾여 움직이질 않아 두 팔로 기어 화장실을 가야 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상흔은 고인을 평생 괴롭혔다. 당시 재판부는 징역 1년6월을 선고했고 1981년 사면을 받아 풀려났다. 2019년 재심을 한 서울고법은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1985년에는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한 중에서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창립했고, 대우자동차노조 민주화 투쟁과 구로동맹파업 등 노동자 투쟁을 지원했다. 1986년 명동성당에서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를 주도하다 또 구속됐다. 이듬해 형집행정지로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6월 항쟁에 참여했다.

1987년 대선에 “민중을 주축으로 민주세력을 대연대시켜 군정을 끝장낸다”는 공약을 내걸고 출마했지만 김대중-김영삼 후보단일화가 무위로 돌아가자 투표 이틀 전 사퇴했다. 92년 대선에는 완주했다.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원진레이온·기륭전자·한진중·쌍용차 … 투쟁하는 노동자 곁에

90년대는 87년 민주화항쟁의 불길이 사업장 민주주의로 옮겨붙던 시기다. 백 소장은 투쟁하는 노동현장 곳곳을 찾았다. 1990년 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이 결성되고 고문으로 추대됐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은폐 규탄대회와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 추모집회 등에 연대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숨진 청년들, 명지대 강경대 열사·성균관대 김귀정 열사 투쟁에도 적극 결합했다. 2000년부터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 살자”는 의미의 노나메기 운동을 시작했다. 같은해 북측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대돼 평양에서 열세 살에 헤어진 누님을 상봉했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에 참석해 경찰 방패에 맞아 다치는 등 투쟁하는 현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용산참사,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투쟁, 파인텍 해고, 콜트콜텍 해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저지 투쟁을 함께했다. 2016년 문정현 신부와 함께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건립기금 마련을 위해 붓글씨와 새김판을 전시·판매하는 ‘두 어른’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심장이 좋지 않던 그는 독일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고, 2018년 4월에는 심장동맥 여러 개를 이식하는 수술을 했다. 심장질환은 호전되는 듯했으나 지난해 9월께부터 폐렴 등을 앓으며 투병생활을 했다. 같은해 11월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아 여러 신문사 기자들이 힘을 모아 신문을 만든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 획씩 그어 보름 만에 ‘노동해방’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정치권과 노동계는 마지막 길을 가는 백 소장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그 치열했던 삶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등한 세상 또한 고인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애도했다. 강은미 정의당 비대위원장은 “선생께서 못다 이룬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더욱 매진하겠다”고 말했다. 진보당은 “염원하셨던 노나메기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추모했다.

장례는 시민·사회단체들이 꾸린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에서 거행한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19일 오전 발인한 뒤 대학로에서 노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치른다.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 영면에 들어간다.

백 소장은 주민등록상으로는 1932년생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1933년이다. 생전 우리식으로 나이 표기를 하길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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