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 청년유니온 조직팀장

운전을 시작하고 사고를 낸 적이 있다. 놀랐고 무서웠고 억울했지만 내가 가해자인 사고였다. 이 경험은 꽤 오래 남아서 운전하는 것을 피하게 됐다. 스쿠터를 타면서는 내가 그런 가해자가 되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 팔이 부러질지언정 남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스쿠터는 도로 위의 약자니까. 누군가는 무법자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직접 해치긴 어려워도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사고 이후 나는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운전할 때마다 새겼다.

지난해를 돌아보면 모두가 피해자뿐인 고난의 해였다. 곳곳에서 피해의 목소리가 속출했고 당장의 삶을 살아 내는 것에 급급했다. 특히나 노동의 영역에서는 우리의 일을 지켜 내야 했고 상황이 악화할수록 ‘우리’는 좁게 해석되곤 했다. 질병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우리는 그렇게 작아졌다.

반대로 자업자득이라는 반성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 자행해 온 가해가 그대로 돌아온 거라고. 그리고 그 피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볼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기후 위기 복선을 경험해 왔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에 당장이라도 멸망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세상은 갑자기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천천히, 시간을 들여 고통스럽게 멸망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키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것이 ‘가치’나 ‘희망’일수도 있고 내 방의 고양이 일수도 있겠다. 재난으로 인해 단순해져 버릴 삶은 누군가에겐 로망일 수 있겠으나 대부분은 절망이다.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가치가 되고 적자생존이 판치는 세상에서 누가 먼저 탈락할 것인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류가 오랜 시간 힘들게 쌓아 온 가치. 지키기는 어려웠고 무너지기는 쉬웠던 그 가치들이 결국 우리를 멸망시킬 것이다. 재난은 발목부터 차오르고 가장 연약한 고리들이 무너져 내리면 곧 내 차례가 올까.

노동운동의 영역에서 기후 위기를 돌아본다. 여기 이곳에서부터 우리의 가해성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가해성을 감각하는 것은 당연히 불편하다. 사람은 늘 자신의 피해만을 보려고 하고 억울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우리 조합원을 지켜야 한다고, 먹고사니즘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중에’를 외치며 외면해 왔던 수많은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 티핑포인트(특정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더는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기)를 지나도 개발을 멈추지 않는 기업과 그런 일자리를 지키는 것이 우선과제였던 노동 관행, 기후 위기로 악화하는 환경에서도 일해야 하는 노동조건이 그러하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확한 정보를 찾기 어려운 것처럼, 활동의 영역에서도 모두가 ‘나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문제의 홍수 속에 빠져있다. 각자의 핵심문제들이 난립하는 가운데 노동조합은 무엇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할 것인가.

개발의 파이를 만들어 내는 기업들의 성장에 동조하지 않고 에너지 모델 전환을 통해 지속가능한 생태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기업에 요구하는 것. 그리고 이런 흐름에 노동자들이 뒤쳐지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정부에 그린뉴딜 일자리 교육을 담은 직업교육 개편을 요구하는 것. 나아가 사회의 속도를 늦추고 개인의 속도를 늦춰서 서로를 돌볼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내는 것 등 기후 위기와 뗄 수 없는 노동의 영역에서 노조의 역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것은 노조와 같이 조직된 힘이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또한 노조로서 약자에 연대하는 원칙을 실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관성을 거스르는 불편하고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다. 기존 산업구조에 대한 저항이자 기성 노동운동에 대한 돌파다. 하지만 우리는 버티는 싸움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살고자 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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