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뉴질랜드 남섬에서 가장 큰 두 호수 테카포와 푸카키는 모두 빙하가 녹아 내려서 만들어진 빙하호수다. 호수라고 하기에는 그 끝이 시야를 넘어가는 통에 작은 바다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그 넓고 깊음이 남다르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출발해 테카포 호수와 푸카키 호수를 끼고 한참을 들어가면 남섬 최고의 산인 마운틴 쿡이 나온다. 마운틴 쿡에 가기 전에 마치 통과의례처럼 들러야 하는 곳이 있다. 푸카키 호수 초입 삼거리에 자리 잡은 연어회센터 ‘마운틴 쿡 알파인 연어 가게’다. 호숫물을 끌어들여 만든 근처의 양식장에서 잡은 연어회에 초장과 고추냉이까지 세트로 묶어 파는데 싱싱하기는 하지만 값싸지는 않다. 노르웨이에서 수입해서 파는 우리나라 연어회 가격과 비등비등하다. 하지만 센터 뒤쪽에 마련된 야외식탁에서 푸카키 호수를 바라보며 한 점 먹어 주는 뷰맛이 일품이니 값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일이 좀스럽게 느껴진다.

뚝딱 한 세트 해치우고 나면 비로소 마운틴 쿡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난다. 물론 여기서 낚시에 빠진 인간들은 옆길로 새서 연어양식장으로 호숫물을 끌어들이는 물 반 연어 반의 운하에서 낚시를 하기도 한다. 여행은 각자의 길과 방법이 있는 법이니 이런 일행이 있다면 과감하게 갈라서서 각자의 길을 가는 게 옳다. 그래 봤자 저녁 밥때가 되면 다 한곳으로 모여들기 마련이니 함께 여행한다고 해서 꼭 묶음으로 다닐 필요는 없다. 그렇게 적당히 헤어졌다 만나야 서로의 존재에 대한 고마움도 새록새록해진다. 그러니 특히 2주 이상의 오랜 여행을 하는 이들이라면 적당한 이별과 적당한 만남을 잘 조절하면 여행 만족도를 아주 높일 수 있다.

30여분 정도 산을 향해 길게 누운 푸카키 호수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드디어 두 빙하호수의 시원이 된 얼음물이 발원한 곳이기도 한 마운틴 쿡의 밑자락에 다다른다. 3천700미터가 넘는 이 산을 맞짱 떠서 오르기에는 체력이 너무 저질이라 산의 밑둥을 슬렁슬렁 걸어 볼 수 있는 가벼운 트래킹을 도전 코스로 잡는다. 후커 밸리 트레킹. 왕복하는 데 4시간 정도 잡으면 되는 적당한 코스다. 고도 차이가 거의 없이 산 밑을 걸어 가서 마운틴 쿡의 빙하를 멀찌감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다. 동네에서 등산 좀 했다거나 날다람쥐 소리 좀 들어 봤다 하는 사람들은 뮬러 헛 루트를 목표로 삼아 볼 만 한다. 500미터 정도 오르막과 계단이 있는 코스라 우리네 등산길과 비슷하기도 하고, 그만큼 더 높은 곳에서 더 트인 시야로 마운틴 쿡을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운틴 쿡을 왼쪽에 두고 푸석거리는 돌길과 넓은 초원 위에 높여진 반듯한 데크를 걷다 보면 문득 신기해진다. 동네 산책길 같은 트레킹 코스 옆으로 만년설에 쌓인 3천미터 높이의 산맥을 끼고 갈 수 있다는 게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지리산이나 한라산을 생각해 본다면 1천500미터 가까이는 가야 나올 법한 풍경들이 산바닥을 걷고 있는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니. 뭔가 블루 스크린으로 합성된 장면 앞을 스튜디오 안에서 걷고 있다는 기분이 든달까.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예의 뉴질랜드의 머리 껍질을 벗겨 낼 것만 같은 거친 자외선이 싹 가져가 준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면서 트래킹을 이어 간다. 이마에 땀 한 방울도 나기 전에 첫 번째 뷰포인트에 도착한다. 뮬러 호수 전망대. 이름 그대로 뮬러 호수를 내려다볼 수도 있고, 앞으로는 계곡 안쪽으로 깊게 들어가는 후커밸리를, 뒤쪽으로는 푸카키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바쁜 단체 여행객들은 대부분 여기에서 발길을 돌린다. 그렇다고 해도 꽤 많은 것을 보고 돌아가는 셈이라 어디 가서 마운틴 쿡을 찍고 왔다고 내세울 만 하다.

후커밸리 코스는 3개의 다리를 건너도록 돼 있다. 쌀뜨물 같기도 하고 물에 우유를 탄 것 같은 밀키한 빙하물이 3개의 다리 밑을 꿀럭꿀럭 흘러내려 간다. 길옆으로는 마운틴 쿡의 새끼 산봉우리들이 계속 함께한다. 그런데 이 산의 허리 위쪽부터 정상까지 덮혀 있는 만년설과 빙하 곳곳이 벗겨져 그 아래 묻혀 있던 돌흙들이 밀려 내려온 모습들이 보인다. 만년설과 빙하에서 끊임없이 녹아내린 물이 만들어 낸 빙하폭포들이 여기저기서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쏟아져 내린다. 누군가에게는 절경으로 보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지구온난화로 신음하는 지구의 모습으로 보일 그런 장면이다.

1시간반 남짓을 부지런히 걸었더니 마침내 후커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 전망대라 해 봐야 별 것 없지만, 호수의 맞은 편 끝에 검푸르게 솟아 오른 빙하와 호수 위를 떠다니는 빙하의 조각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트레킹을 완주했다는 성취감은 충분하다. 조금 부족한 느낌이 든다면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빙하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캠핑카를 몰고 다니는 여행자라면 트레킹 출발지점에 뉴질랜드 정부에서 운영하는 화이트 호스 힐 캠프사이트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전기를 끌어다 쓸 수 없어 불편하기는 하지만, 한밤중 쏟아지는 별 구경을 하거나, 푸카키 호수로 떠오르는 일출을 보기에 이만한 장소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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