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건준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라떼의 노동은 위대했다.

우리는 성경의 첫 문장을 바꿔 “태초에 노동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했다. 이성과 과학을 믿은 청년 유물론자인 우리에게 노동자는 하느님과 동급이었다. 꼰대를 비꼬는 신조어 ‘라떼’의 어원 그대로 ‘나 때’는 그랬다.

지금도 그 정신은 민주노총과 소속 조직 선언문에 노동자는 “생산의 주역”이고 “역사의 주인”이며 “역사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박혀 있다. 노동에 대한 자부심 쩐다. 정신승리가 아니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모진 탄압을 이겨 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건설을 거친 노동자 대표 민주노총 창립, 1996~1997년의 총파업 등이 그 증거였다.

착취받지 못한 슬픔

1997년, 부도난 대기업 여의도 본사에서 쇠사슬로 몸을 묶었던 투쟁을 기억한다. 1998년, 역사상 첫 대규모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동현장이 생생하다. 2001년, 정리해고 통지서를 가져온 우체부가 사원 아파트 초인종을 울리자 무너져 내리던 여인들을 기억한다.

노동시민은 돈이나 ‘빽’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특권층과 달리 몸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이마저 차단당한 슬픔이 찾아왔다. “공장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노동해방은 사라지고 착취받기를 원했다. 죽음의 공포가 종교를 찾게 하듯 실업의 공포가 일자리 종교를 퍼뜨린 것 같았다. 외환위기로 덮쳐 온 고용빙하기는 노동을 그렇게 바꿨다.

해고 공포는 노동자를 길들이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생산통제권은 사용자에게 넘어갔다. 생산을 통제하는 자가 생계통제권을 틀어쥔다. 외환위기 후 12년, 세계가 금융위기에 빠진 2009년, “해고는 살인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업의 공포가 이어졌다.

종말 대신 피라미드

“노동의 종말”과 “기계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라는 말이 21세기 시작과 함께 한국에 부쩍 나돌았다. 노동계급을 떠난 혁명은 자본의 것이 됐다. 그들은 새 프롤레타리아인 기계로 자동화 혁명을 추진했다.

노동의 종말은 없었다. 대신 노동 서열화가 진행됐다. 정리해고제·탄력근로제와 함께 노동 삼재라 불리던 파견근로제로 노동자를 팔아 돈을 버는 중간착취이자 노동 매매가 합법화했다. 기업은 유행한 아웃소싱을 통해 ‘바지사장’을 곳곳에 만들었다. 아웃소싱된 노동은 쉽게 잘리는 불안정 노동이 됐다.

숙련이나 직무에 따른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자는 주장은 허망했다. 노동 값은 전문가 이론이 아닌 자본의 힘이 결정했다. 내 고용주가 원청사용자인가 하청사용자인가. 하청이라면 1차인가 n차인가. 서열화한 산업 피라미드는 임금만이 아니라 신분을 결정했다.

선망과 원망, 동정과 냉정

“고”하면 공장이 돌고 “스톱”하면 멈추는 고스톱 내공을 가진 대기업 노조는 노사관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정리해고로 정신적 피폭을 당한 후, 그들은 자기 지키기에 충실했다. 반면 외주화된 노동자는 쉽게 잘리고 다른 노동자로 대체됐다. 생산통제권의 다른 표현인 고스톱 내공을 가질 수 없었다.

대기업 노동에 되고 싶은 선망과 되지 못한 원망이 엇갈렸다. 귀족노동이라는 보수와 기득권이라는 진보의 비판이 이어졌다. 불안정 노동에게 불쌍히 여기는 동정과 차별하는 냉정이 엇갈렸다. 비참한 노동이라는 진보와 당연한 유연화라는 보수의 시각이 따라다닌다.

계급운동은 선망과 원망 사이에 폭망하고, 노동은 동정과 냉정 사이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정규직으로의 계층상승이 노동운동 목표인 것처럼 변했다. 비정규·하청으로 불리는 노동자들은 “진짜 사장 나와라”를 외치며 주인을 찾고, 원청이 진짜 사용자라는 것을 법원에 증명하려 애써야 했다.

새 혁명론과 뉴 프롤레타리아

대한민국헌법 11조는 차별을 금지하고 특수계급을 금지한다. 헌법 위반자들은 불안정 노동계급을 확산시켜 알바천국을 만들었다. 배달의 민족은 플랫폼 노동자가 돼 무권리 늪에 빠졌다. 노동이 위대한 라떼는 가고 노동이 버려진 헬조선이 왔다.

노동은 침묵하지 않는다. 열정페이 규탄, 갑질 지탄, 알바 착취 비판, 플랫폼 노동자의 저항이 일어난다. 특수고용직은 노동자로 인정받으려 투쟁한다. 영세 자영업자는 프롤레타리아가 돼 있다. 노동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노동자로 인정받기 위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조 개정이 필요하다. 헌법도 무시하는데 그깟 법이 소용될까. 헌법 1조가 아니라 11조를 부르며 촛불을 들어야 하는가.

자본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혁명의 깃발을 다시 들었다. 4차 산업혁명이 그것이다. 혁명을 이끌 새 프롤레타리아는 인공지능(AI)이다. 노동종말론은 20세기 기계 프롤레타리아에서 21세기 AI 프롤레타리아로 반복한다. 4차 산업혁명론은 노동을 인공지능에게 내주고 물러나라 설교한다. 대체될 존재는 버려질 뿐 존중받지 못한다.

고맙다 필수야

코로나19가 가려진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투자 은행가는 없어도 살지만 의료진, 생필품을 파는 가게 직원, 배달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못 산다. 생존에 기본이 되는 필수노동을 미국은 이센셜 임플로이(essential-employees), 영국은 키 워커(key-worker)라고 한단다.

놀랍게도 수만·수천·수백이 매일 모여 일하는 공장은 코로나19 대규모 확산지가 된 적이 없다. 방역에 최선을 다하며 공장과 회사에 모여 일한다. 노동 없이 이윤도 경제도 없기 때문이다. ‘관광의 종말’이나 ‘이동의 종말’이 올지 몰라도 ‘노동의 종말’은 없다.

땀보다 더 돌려주지 않는 노동에 대박은 없다. 대박은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 불로소득을 얻는 특권층의 것이다. 저성장과 재난에 눌려 있던 대박 욕망이 꿈틀댄다. 빚을 끌어다 주식과 부동산에 퍼붓는 빚테크가 전염된다. 성실한 노동으로 따라갈 수 없으니 ‘노동존중’이 아닌 ‘노동실망’이 퍼진다. 노동의 소중함을 코로나19가 일깨우고 빚테크가 밟으니 차라리 바이러스를 지지할까.

모델이 바뀐다

위대하지 않아도 소중하고 힘들어도 필요한 것이 노동이다. 찬양은 우월감을 키워 서열을 만들고 동정은 열등감을 키워 지질하게 한다. 라떼의 위대한 노동은 없다. 라떼 이후의 짓눌린 노동도 없어야 한다. 다수 시민의 생활방식이자 사회를 지탱하는 에너지인 모든 노동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나너지 적정노동’이 필요하다. 노동은 내 생계와 내가 만든 것을 쓸 너를 위한 것이다. 이제 지구별 생태계를 생각해야 한다. 탄소배출이 많은 노동은 생태계의 적이 되고 있다. ‘나’와 ‘너’와 ‘지’구별을 위한 적정노동이 필요하다.

실업 걱정에 머물면 재난기는 고통으로 기억될 뿐이다. 아이·노인·환자를 위한 돌봄노동 처우를 높이고 돌봄서비스를 확대하자. 청소부터 미래산업에 이르기까지 친환경 노동을 늘리자. 산업 전환기인 지금이야말로 노동운동이 산업 재설계에 나서야 한다.

개념이 달라진다. 조직 형태만 바꾸려다가 무늬만 산별노조에 그쳤다. 융합되고 통합돼 플랫폼이 돼 가는 산업, 기후 위기 등 변화에 어울리는 신개념 노조가 필요하다. 낡은 노조 개념으로 노조할 권리를 대폭 넓힐 가능성은 없다.

모델 노조가 바뀐다. 대기업 노조와 달리 공감의 힘을 가진, 계층상승에 얽매이지 않고 권리를 넓히는 노조가 생기고 있다. 오래된 필수노동, 여성이 많은 일자리, 첨단 산업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변화무쌍한 노동의 역사 위에 적정노동이 만발할 것이다.

산업노동정책연구소 기획실장 (jogju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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