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

10만명이 넘는 노동자·국민의 청원을 담아 국회로 넘어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표류 중이다.

과잉입법과 처벌에 대한 소위 법전문가들의 우려를 담아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신중론이 득세하고 있다. 구멍가게 주인들만 처벌될 것이라는 예측은 법안의 허점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그것을 빌미 삼아 실제로는 대기업 사장들을 지켜 주고자 함인지, 혹은 그들에게는 관대하기 짝이 없는 사법관행에 대한 자조(自嘲)인지 모를 지경이다.

도대체 완벽한 법률이 언제 있었던가, 그런 법률이란 있기라도 한 것인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수많은 비판 속에는 나름의 진정성이 담겨 있기도 하다. 법률안이 마련되면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빈틈과 허점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난 15년간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위한 논의와 투쟁의 과정을 무시하고 허투루 보지 말아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는 240여개 단체들의 면면을 보라. 법안의 허점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른 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전문가적 식견이라는 것 역시 자신의 존재 기반과 당파성에서 비롯되는 입장일 뿐이다. 당신들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15년간 같이 논의하고 검토하고 고민해 왔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그동안 노동자들은 계속 죽어 갔다.

처벌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능사인지 이야기해야 한다. 다 얘기하지 않았냐고? 그럼 그 무엇이 지금까지 왜 기능하지 못했는지 설명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그 무엇을 시작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내 말대로 했으면 됐다가 아니라 왜 이제껏 안 돼 왔는지 답해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지난 수십 년간 막을 수 있었지만 막지 못했던 노동자들의 죽음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기에 제기됐고, 15년 동안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투쟁과 대안들 속에 있었으며 법 제정 과정 자체가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겨우 법률안이 국회로 진입한 것이다.

처벌이 아닌 기업과 사장님들의 선의로, 산업재해예방 캠페인으로, 사명감에 불타는 근로감독관들의 활약으로, 생명에 대한 가치의 존중만으로도 노동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면 왜 산재 유가족들과 비정규 노동자들이 다시 길바닥으로 나서겠는가? 이미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형이 규정돼 있던 산업안전보건법상 ‘범행’을 저지른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나 500만원에서 1천만원에 불과한 벌금형을 내리는 사법관행이 있는 나라, 그나마 원청 기업과 관계자들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안 하는 검사들이 있는 나라, 근로감독관들조차 재해가 발생한 현장에 적용해야 할 산업안전보건법과 규칙의 조항이 무엇인지 갈팡질팡해야 하는 나라에서 바로 이 시점에 노동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과 투쟁의 결과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전례가 없으면 안 되는 일이 많은지라 외국 사례를 들게 된다. 그러면 노동안전보건에 대한 사회적 기반이 외국의 상황과 우리의 상황은 다르다고 이야기하거나 혹은 외국 사례에서 부족했던 지점을 부각해서 드러낸다. 외국에 비해 부족한 사회적 기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지를 이야기하면 될 일이고, 외국의 입법례에서 부족했던 지점은 잘 논의해서 채우면 될 일인데, 오로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해서는 안 되는 논리로 이용된다. 외국 사례도 이제 그만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역사와 조건에 기반을 둔 제도와 방안이 필요한 것이다. 유수의 대기업이 최첨단 반도체기술을 개발하면 세계 최초, 전례 없는 혁신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을 터, 노동자들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전례 없는 입법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인가?

노동자들의 위험이 기업에도 똑같은 위험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기업의 위험은 오너 리스크니 외환 리스크니 해서 주로 경영상 위험(리스크)을 말한다. 문제는 일터의 위험은 노동자들에게는 정신과 육체의 온전성을 파괴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기업과 사업주들에게는 (경영상의) 어떠한 리스크도 되지 않기에 발생한다.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마주치는 위험이 관리되지 않으면 바로 기업의 리스크로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안전해야 기업이 리스크로에서 안전해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핵심은 처벌이 아니라 시민과 노동자들의 안전이다.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을 정책의 향방에 대한 민의는 이미 전달됐다. 산재 사망사고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현 정부가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보여줘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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