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현정 공노총 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예산안 설명을 위한 시정연설에서 “민생과 개혁이라는 국민의 요구에 부응할 때 협치의 성과는 더욱 빛날 것”이라며 국회와 행정부의 ‘협치’를 강조했다.
협치(協治)는 통치(統治)와 별개의 개념이다. 통치는 각 사회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한을 지도자에게 양도하고, 혹은 양도당해 대리인으로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협치는 각 사회 주체들이 국정에 참여해 운영하는 개념이다. 통치가 지도자의 의중과 능력에 의존한다면, 협치는 사회 주체들의 참여와 민주적 의사 형성절차로 공동체를 운영한다는 점에서 제도보다 문화의 개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87년 6월 항쟁 이전까지 한국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군부와 정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말 그대로 통치의 시대였다. 공무원의 의무는 단지 정책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역할이었으며, 비상계엄과 같은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가폭력의 공범이 되기도 했다. 6월 항쟁과 개헌으로 사회 각 부문에서 민주화가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노동 3권과 노동조합 활동을 비롯한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으며, 직장 민주주의와 사회 민주화를 추동했다. 그러나 공무원 노동자들은 여전히 6월 항쟁 이전에 어쩌면, 노동 3권조차 생소한 전태일 분신 당시에 머물러 있다.
정치·노동기본권이 없는 공무원들은 입과 귀가 막힌 채 정권의 도구로 이용됐다. 개발독재 시기 정경유착부터 4대강과 국정교과서까지. 국민에게 부당한 정책이라도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미명하에 국가폭력의 공범이 돼 왔다.
대통령이 강조한 협치의 전제조건은 ‘참여’다. 참여는 제도적인 안전망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공무원노조와 공무원은 정부와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행정정책의 매개자다. 행정의 호응성을 높이고, 국민에게 와 닿는 정책이 집행되기 위해선 공직사회의 비민주성을 없애는 것이 그 관건이다. 기관장이 실무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사고가 일어나면 ‘꼬리 자르기’가 일상화된 공무원 사회에서 책임감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것은 가혹한 처사다.
면책 사유 몇 가지를 개정한다고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공직사회가 이뤄지지 않는다. 면책 사유 몇 개가 공무원들이 겪는 모든 경우의 수를 포괄할 수 없다. 공무원과 정부·국민이 함께 만드는 협치가 가능하기 위해선 공무원의 기본권 보장이 관건이다. 공무원 개인에게 정책에 대한 반론과 발언권이 보장되고, 공직사회에서 공무원 노조가 스스로 자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감시·견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참여적인 공직사회, 정부와 국민이 함께 만들어 가는 협치가 가능할 것이다.
이제, 다시 공무원의 기본권이 무엇인지 의미를 되새겨 볼 때다. 오늘날 기본권의 의미를 민주주의의 실현 과정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발전할수록 공직사회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나가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진정 협치의 중요성을 강조할 것이라면,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의 기본권이자 인권이다.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부르짖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외침은 곧 공무원이 노동·정치기본권을 보장받는 시작점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