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외환위기 점검 기구인 국제금융센터(소장 전광우)가 17일 제2차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이 센터는 17일 청와대와 재정경제부 등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국내에 들어온 외국 자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6월말 현재 902억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로도 외환위기를 완벽하게 막는다는 보장은 없다 ”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물론 외자의 급격한 이탈과 자본 자유화 후 국내 자본의 이동 가능성 등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워 당장에 외환위기가 오는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으나 “절대로 외환위기 재발 가능성이 없다”는 입장을 취해 온 기존의 정부 입장과 크게 다른 것으로 주목된다.

국제금융센터는 이날 ‘외국인 주식투자 확대에 따른 영향 및 문제점’보고서에서 “국내 주식에 대한 외국인 투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한국 금융시장은 외부 충격에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됐다”면서 급격한 자본 유출에 대비해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500억달러에 육박하는 단기외채의 만기 연장이 차질을 빚고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중 20% 가량이 동시에 유출되면 국내 자본의 해외 도피와 맞물려 97년과 같은 외환 부족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는 것.

일부 민간연구소들이 ‘한국경제 위기론’을 몇 차례 언급한 적은 있지만 준정부 기구인 국제금융센터가 위기 발생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정부의 각성을 촉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 97년 7월 동남아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3년째를 맞아 당시 진원지인 인도네시아 루피아화 등 동남아 통화 가치가 연일 폭락하는 와중에 나온 것이어서 금융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제2의 외환위기’ 가상 시나리오〓국제금융센터가 걱정하는 대목은 경제 상황이 나쁘면 언제든 국외로 빠져나가는 속성을 지닌 단기외채와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이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늘었다는 점.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올 상반기에만 무려 96억3000만달러가 순유입돼 지난해 연간 순유입 총액인 52억달러를 크게 웃돌았다. 만기 1년 미만 단기외채는 5월말 468억달러로 불어나 한때 20%선까지 낮아졌던 총외채 대비 단기외채 비중이 2년2개월 만에 최고치인 33.1%로 치솟았다.

국제금융센터는 6월말 현재 902억달러인 외환보유고만으로는 ‘단기차입금 일시 상환→외국인 주식자금 유출→국내 자본의 해외도피 러시→외환 지급불능’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에 대처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논리는 97년 위기 당시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주식중 20%를 한꺼번에 팔아 치워 국내 주가 폭락과 환율 급등(원화가치 급락)을 촉발했던 ‘뼈아픈 전례’에 바탕을 두고 있다.

6월말 현재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중인 주식(거래소 기준)의 시가총액은 87조7000억원대. 이 가운데 20%를 매각할 경우 대량 매도에 따른 주가하락 효과를 감안해도 매각 대금이 15조6000억원에 이르고 60억∼130억달러에 이르는 돈을 환전하는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은 무려 48.2% 상승한다는 것. 기업과 일부 부유층이 환차익을 노려 여유 자금의 국외유출 대열에 합류하는 사태로 발전하면 우리 정부의 대외 지불 능력은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된다.

▽위기 재발 정말 현실화될까〓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는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모범 사례로 한국을 꼽는다.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의 민간 투자자들은 한국의 위기 극복 성과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경제 체질이 근본적으로 강화됐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심쩍어 한다.

루피아화와 태국 바트화가 약세를 보이자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의 순유입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 원화가치가 ‘전염효과’로 인해 덩달아 떨어진 것이 대표적인 예.

미국계 증권사인 메릴린치 관계자는 “선진국 투자자본은 IMF체제를 경험한 국가를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는 한 ‘한 묶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면서 “한국과 동남아는 경제 기초 여건이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방심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재경부는 은행 파업으로 국가신인도가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대외 여건이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전개되자 외국인 자금의 이동 상황과 외환거래 흐름을 정밀 점검하는 등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김용덕 재경부 국제금융국장은 “단기외채 급증과 외국인 투자자금의 단기화 경향에 대해서는 정부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위기가 재발되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책은 세워야겠지만 최악의 시나리오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 환은경제연구소 신금덕 동향분석팀장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투자한 자금을 되찾아 가려면 주식을 팔 때와 달러로 환전할 때 이중의 피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의 경제 흐름에서는 현실화할 확률이 극히 희박하다”면서 “다만 외환보유고를 우직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넉넉하게 쌓는 것은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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