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지난해 일하다가 사고나 병으로 죽은 노동자는 2천20명이었다. 안전보건공단이 4월27일 낸 ‘2019년 산업재해 발생 현황’에 나오는 수치다. 사고 사망자 855명, 질병 사망자 1천165명이다.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이라 평가받는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게 1961년이다. 정부 공식통계에 의지해 매년 2천명의 노동자가 죽어 갔다고 치면, 박정희 정권 이후 지금까지 최소 12만명이 한강의 기적을 위해 죽었다.

안전보건공단 자료를 보면 지난해 재해자는 10만9천242명이었다. 일하다 다친 사람은 9만4천47명이고, 일하다 병에 걸린 사람은 1만5천195명이었다. 사망자 통계 추세와 다르게 지난해 보다 늘었다. 역시 매년 비슷한 수의 재해자가 발생했다고 치면, 한강의 기적을 위해 목숨은 부지했으나 병들고 다친 노동자는 600만명이 넘는다.

참고로 한국전쟁 때 죽은 미군이 3만7천명, 국군이 13만8천명이다. 2001년 시작해 20년 넘게 끌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침략전쟁에서 죽은 미군은 2천451명으로 연평균 100명을 조금 넘는다. 국민경제를 전쟁의 폐허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한국의 노동자들은 전쟁을 치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경제는 노동자들의 피와 살로 건설된 것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되면 노동자의 죽음은 종식할까. 흉악범죄를 저지른 자들에 대해 큰 처벌을 가하는 법률이 있지만 흉악범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것과 같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제정된다고 노동자의 죽음이 종식되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을 죽게 한 이들에 대한 엄한 처벌은 필요하나, 이는 문제 해결을 향한 대장정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은 아니다. 특히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수동적인 접근법이지 능동적인 접근법이 아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이어 노동자들이 안전과 건강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만드는 후속 운동이 필요하다.

산업안전보건 문제에 대한 접근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행위(behaviour) 중심의 접근법이다. 안전보건 문제가 일어난 원인을 인간의 행위에서 찾는 것이다. 둘째 체제(system) 중심의 접근법이다. 나라의 법과 제도, 회사의 정책과 규정 같은 시스템에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셋째 권리(right) 중심의 접근법이다. 일터의 안전과 보건을 잠재적 피해자인 노동자의 권리로 인정하고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 당사자인 노동자를 문제 해결의 주체로 세우는 것이다. 물론 이 세 접근법은 어느 하나가 다른 것에 비해 우월하다기보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상호 의지하고 상호 작용한다.

일하다 죽거나 다치는 노동자가 많은 나라일수록 행위 중심의 접근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잘못된 행위를 저지른 책임은 사용자나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미루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국의 경우 행위 중심의 접근법과 체제 중심의 접근법이 주를 이루는 반면, 권리 중심의 접근법은 아직 미약하다.

노동운동과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 제정하려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도 행위 중심과 체제 중심 접근법의 테두리에 있다. 사용자의 ‘행위’를 처벌하는 ‘체제’를 만드는 방식을 통해 노동자의 안전을 확보하고 건강을 보호하려는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입장에서 볼 때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인 것이라 평가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권리 중심의 접근법에서 말하는 권리는 3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노동자의 정보권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안전·건강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사용자에게 안전·건강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공개할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기업의 영업 비밀’이니 ‘국가 핵심기술 유출’이니 하는 이유로 안전과 건강 정보를 노동자에게 숨기도록 허용하는 법과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둘째 안전하지 않은 일을 거부할 권리, 즉 작업거부권을 노동자에게 부여해야 한다. 노동자가 위험하다고 느낄 경우 작업을 스스로 중단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그곳을 벗어나게 해야 한다. 셋째 산업안전보건과 관련한 회사의 정책 수립과 운영에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 사고가 일어났을 때는 조사·보고·대책 마련 등의 모든 과정에 노동자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동자 안전과 건강 문제의 획기적 전환을 위해 ‘행위’와 ‘체제’ 중심을 넘어 ‘권리’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할 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이어 노동운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할 제도는 산업안전보건법 2장에 나와 있는 안전보건관리체제(Occupational Safety and Health Management System, OSHMS)로 보인다. 동법 24조가 규정한 노사 동수로 구성되는 산업안전보건위원회는 노조가 없으면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보다 심각한 것은 제조업은 “상시 근로자 50명 이상”, 건설업의 경우 “공사금액 120억원 이상”, 급성장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개발 및 공급업을 비롯해 농업·어업·서비스업은 “상시 근로자 300명 이상”의 경우에만 산업안전보건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못 박은 시행령 34조다. 이러한 기준은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로자참여법)이 규정한 노사협의회 구성 요건인 30명 이상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이 높다.

안전보건관리 체제를 규정한 산업안전보건법 2장에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만큼 관심을 끄는 제도는 21조에 나오는 안전관리 전문기관과 보건관리 전문기관이다. 민간병원이나 사설업체가 대부분인 이들 기관은 “300명 미만을 사용하는 사업장”에서 법이 규정한 안전관리자와 보건관리자의 업무를 위탁받아 안전보건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들 안전보건관리 대행기관 사업의 문제점은 공적인 통제 없이 시장 논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점과, 노조를 포함한 노동자대표의 참여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50명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부실한 제도마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생명보다 돈을 앞세우는 사용자와 자기 책무를 다하지 않은 공무원에 대한 처벌은 기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노동자들이 겪는 죽음의 행렬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현행 제도가 챙겨 주지 않고 공중파 뉴스에 소식 한 줄 나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는 사용자와 공무원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처벌을 넘어 노동자의 참여와 권리가 보장되는 ‘안전보건관리체제’ 수립을 위한 사회운동이 조직돼야 한다. 물론 이것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추진해야 하는 과제다.

아시아노사관계(AIR) 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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