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21일에 인천지검 앞에서 고 김일두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명숙>

“활동가로 처음 서는 것이라 떨려요.”

최근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에 가입한 과로 자살노동자 고 김일두님의 부인 박소영 씨의 말이다. 남편을 죽게 만들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책임회피용 소송을 걸고 있는 K건설회사에 대한 고소 기자회견을 앞둔 때였다. 처음 발언이라 몹시 떨렸나 보다. 그런데 나는 ‘활동가’라는 단어가 더 귀에 꽂혔다. ‘다시는’의 성격과 지향에 대한 논의를 몇 차례 거친 후였기에 그 단어가 다르게 다가왔다.

‘다시는’은 산재피해 가족들이 모인 자조 모임이 아니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위해 실천하는 조직이다.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할 때 강조하는 내용이다. 각자의 현실에 맞게 ‘활동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된다. 한마디로 산재피해 가족으로서 활동을 결심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렇다 보니 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위해 시민 대상 홍보활동도 하지만 공부도 꾸준히 한다. 한 달에 한 번 하는 정기모임에서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만이 아니라 다른 사안에 대한 것도 공부한다. ‘다시는’ 가족들은 궁금한 게 많다. 이른바 가족의 사망을 계기로 첫 발을 들인 ‘운동사회’는 용어도 사람도, 모든 것이 낯설다. 게다가 산재와 관련한 법들도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하나하나 배우며 싸울 준비를 하는 수밖에.

“세상을 몰랐던 그 시절로 못 돌아가겠죠”

교육 주제는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우선으로 정한다. 노동이나 산재 관련한 교육만 하지 않는다. 올봄에는 ‘반성폭력 예방교육’도 했다. 텔레그램 N번방 성폭력 사건을 접하면서 ‘다시는’ 성원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뒤돌아보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다. 아직 반성폭력교육이 낯선 고 홍수연님의 아버지 홍순성씨마저 의견을 낼 정도로 모두 열심히 교육에 참여했다. 너무나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을 당하고도 오히려 비난을 받는 현실이 산재피해 가족과 비슷하다”며 한숨을 쉬던 고 김동준님의 어머니 강석경씨나, “우리 때는 너무 모르고 당한 게 많다며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던 고 김용균님의 어머니 김미숙씨. 우리 사회가 얼마나 피해자에게 가혹한지 경험해 봐서인지 공감이 컸다.

‘다시는’ 가족들은 활동을 하면 할수록 세상을 알게 된다며 쓴웃음을 짓고 했다. 알수록 너무나 부조리하고 불평등하니 안다고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 김태규님의 어머니 신현숙씨는 “태규가 죽기 전의 나로, 세상을 몰랐던 그 시절로 다시는 못 돌아가겠죠”라며 앎의 괴로움에 대해 말하곤 했다. 알게 돼서 가만히 있기는 어렵다. ‘다시는’ 가족들은 오늘도 부단히 익히며 움직이는 이유가 된다.

활동지침을 만들다

'다시는'은 올해 1월부터 활동원칙을 논의했다. ‘다시는’은 구체적으로 모임의 상을 결정하고 시작하지 않았다. 김용균 투쟁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모인 산재피해 가족들과 활동가들이 ‘산재피해 가족운동의 필요성’으로 모였다. 그러다 2019년 4월 아름다운재단의 기금을 받아 산재피해 가족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필요성을 알리고 산업체 파견형 현장실습 제도의 문제점을 알리는 활동을 정하면서 명칭도 정했다. 1년간은 시민들을 만나 억울한 죽음의 현실과 제도의 문제점을 알리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1년이 되는 시점에 구성원들 간의 평등과 존중을 위한 원칙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논의 과정은 구성원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지지할 뿐 아니라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과정이었다. ‘함께 잘 활동하기 위하여’라는 활동지침으로 정리했다. ‘다시는’의 정체성을 “피해가족 스스로 산재를 막고자 운동의 주체로 등장해 운동을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정리했다.

세 번의 논의과정을 거쳐 나온 ‘다시는’ 활동지침에는 모임의 성격이나 활동목표 외에도 ‘피해가족의 특성과 과제’ ‘피해자의 자격 묻기 경계’ ‘치유와 자기실현의 운동’ ‘사회운동과의 관계’ ‘평등한 관계’ 등이 논의됐다. 피해가족의 특성에 따른 사회의 편견이나 차별에 갇히지 않기 위해 서로 배려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다짐했다. ‘피해자의 자격 묻기 경계’에 대해서도 깊게 논의했다.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의 자격을 묻고 검열하는 일은 흔하다. 가부장적 가족주의 사회는 가족이 산재로 피해를 입어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가족주의 도덕성’과 ‘가족에 대한 헌신’으로 피해자 자격여부를 묻곤 한다. 자격묻기가 또 하나의 비수임을 알기에 우리는 그런 흐름에 휩쓸리지 말자고 했다.

또 하나 깊이 논의했던 것 중 하나는 ‘치유와 자기실현의 운동’이었다. 세상은 피해 가족의 ‘고통’에 주목한다.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주체로 등장할 때 주목도는 더 높아진다. 세상의 주목과 기대감 때문에 피해자들의 삶이 그것에 갇히는 걸 지향하진 않는다. 피해자들이 사명감 때문에 아파도 치료도 받지 않고 활동하거나 의무감으로 모든 걸 다 감당하려다 더 아픈 삶을 살지는 말자고 토닥였다. 강석경씨는 “힘들면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쉬고, 그 쉼을 이해하자”고 했다. 고 이한빛PD의 아버지 이용관씨도 좋은 일 있으면 웃고 웃었다고 죄책감을 갖지는 말자고 다독였다. 김미숙씨도 “어떻게 웃을 수 있냐”는 하루 24시간을 눈물로 보내야 할 것 같은 편견의 압박에 시달렸던 경험을 말하며, 새로 들어온 박소영씨를 응원했다. 고통을 받아들이되 고통에 갇히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서로의 일상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치유와 자기실현의 운동은 가능하다고 마음을 모았다. 물론 쉽지는 않다.

‘다시는’의 구성원은 산재피해 가족만이 아니다. 노동자 건강권 운동을 하는 단체와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함께한다. 반올림의 이상수, 김용균재단의 권미정,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의 명숙, 노동건강연대의 정우준, 민주노총의 이현정이 구성원이다. 이들도 산재피해 가족운동을 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반올림에서 산재피해 가족과 활동한 경험이 있는 이상수 활동가는 ‘다시는’ 활동지침을 만든 것이 활동의 중요한 이정표를 마련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경험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해석한 것을 나누는 속에서 서로의 관계도 한층 성장하고 그래서 모임이 탄탄해진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저만이 아니라 다른 구성원들도 한발 앞으로 간 거랄까요. 아무래도 토론한 결과물이니까 보통의 규칙이 주는 것과는 다른 지혜를 얻은 거 같았어요.”

▲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그 외에도 당사자와 비당사자, 여성과 남성, 나이 등이 다른 구성원이 존재하는 모임인 만큼 ‘평등한 관계’에 대해서도 활발히 논의했다. 사소한 것들이라고 미뤄 뒀던 것들이 관계를 어렵게 하곤 했던 과거의 당사자조직이나 가족운동을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내린 방향이다.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위계가 생기지 않도록, 나이가 많거나 남성이라서 발언권이 편중되지 않도록 서로가 신경을 쓰자고 했다. 발언권이 한 사람에게 독점되지 않는 것이 그 시작이라는 이야기도 나눴다.

이제 2년째에 접어든 ‘다시는’ 의 가족들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의 중요한 활동가로 거듭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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