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 시인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심한 계급사회다. 그래서 자본가계급, 시민계급, 노동자계급 같은 말들이 귀에 익숙하다. 그런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너무 낯선 계급 명칭을 만나는 순간 저런 말이 있었나 싶은 당혹감이 찾아들었다.

카드계급(card階級) : 빈민 조사 카드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

분명히 요즘 쓰는 말은 아닐 것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저 말이 쓰인 용례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일본에서 쓰는 말인가 싶어 일본어사전과 야후 재팬 등을 뒤져 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발견한 게 일제강점기 때 나온 신문기사였다.

“급격히 현대적 성격을 형성해 가는 도시 경성에서 ‘태양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세민층 소위 카-드계급에 공동주택을 제공하려는 따뜻한 계획이 경성부 당국의 손으로 진행되고 있다.”(1940년 6월21일자 동아일보)

여기에 ‘카-드계급’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서 기사는 “세궁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성동(城東), 서부(西部) 용강(龍江) 등지의 부유지 혹은 국유지를 택하여 우선 오백 호 정도”를 지을 계획으로 예산을 편성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당시에는 집이 없어 토막(土幕)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민중이 겪어야 했던 빈민들의 생활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고, 그런 참상을 그린 문학 작품도 꽤 많다. 그런 가운데 경성부가 빈민, 기사에 나오는 표현을 따르면 세민층에게 집을 지어 주기로 했다는 건 총독부가 빈민 구제책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은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신문기사들을 보면 세민(細民)·세궁민(細窮民)·세민층(細民層)·세민가(細民街) 같은 말들이 나오는데, 이들 낱말은 모두 국어사전에 표제어로 등재돼 있다. 세민(細民)과 함께 빈민(貧民)이라는 말도 그 당시에 널리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빈민가’나 ‘빈민굴’ 같은 말은 안 보이고 대신 ‘세민가’와 ‘세민굴’이라는 말을 썼다. 이렇듯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말도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즘은 세민 대신 영세민(零細民)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세민(細民)이라는 한자어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쓰인 기록이 있지만 영세민이라는 말은 해방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민 앞에 ‘영(零)’자를 붙임으로써 세민을 강조하거나 세민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말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빈민들의 수를 조사해서 카드에 기록했다는 내용이 당시의 기록에 남아 있다. 이런 카드를 ‘세민표(細民表)’라 불렀는데, 이 말은 국어사전에 없다. 계속해서 신문기사 내용을 더 살펴보자.

“최근 부내 각 방면 위원들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7월 말 현재 부내의 카드에 등록한 제1종, 제2종 세민은 다음과 같이 7천322호의 3만1천848인이었다. 이를 작년 7월 말 현재 5천859호의 2만5천98인에 비교하면 다음과 같이 호수에 있어서는 1천522호, 그 인구에 있어서는 6천750인이 각각 격증되었다.”(1934년 9월8일자 동아일보)

이 수치는 당시 경성부 내에 거주하던 전 조선인의 12%에 해당한다고 한다. 이 수치도 적은 건 아니지만 해가 바뀌면서 수천 명씩 계속 늘어났다. 그만큼 당시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빈궁의 골짜기로 내몰리고 있었는지 알게 해 준다.

기사에서 세민카드에도 1종과 2종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1종 세민은 ‘시급한 구제는 필요치 않으나 일상생활이 구차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2종 세민은 ‘1종 세민보다도 더욱 빈궁하여 다른 사람들의 자비와 때때로 구제에 힘입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을 가리킨다. 요즘으로 치면 기초생활수급자들이라고 하겠는데, 지금도 차상위와 차차상위 등으로 구분하듯 빈곤의 차이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건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경성부가 지어 주기로 한 공동주택은 요즘의 임대주택이나 임대아파트쯤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아무리 식민지 치하일지라도 총독부가 빈민들의 주거 문제를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안 그럴 경우 폭동이나 방화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그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유화책을 쓴 셈이다.

‘카드계급’이라는, 당시 역사를 전공한 이가 아니라면 들어본 사람도 거의 없을 낱말을 찾아서 표제어로 올려 둔 노고는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특정 시대에만 쓰이던 낱말이라면 그 시기를 풀이에 반영해서 밝혀 주는 게 국어사전 독자들에 대한 배려일 수 있다. ‘세궁민’이나 ‘세민가’ 같은 낱말의 풀이도 마찬가지다.

박일환 시인 (pih6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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