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훈 공인노무사(서울교통공사노조)

노동조합은 대한민국 헌법 33조에 의해 보호받는다. 수만 개에 이르는 한국의 조합 중 헌법에서 보호하는 유일한 조합이 노동조합이다. 이 특별한 보호에는 일정한 의무와 책무를 동반한다. 노동인권을 수호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지만 공동체의 공공선을 지키는 책무를 포함한다.

이 책무는 소극적 의무가 아닌 적극적 의무다. 노조가 인간 존엄성(인권) 옹호자여야 함을 말한다. 민주노총은 이미 강령에서 이를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참된 민주사회를 건설한다고 선언하면서, 인권 옹호자로 기여하는 것이 민주노총의 존재 목적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민주노총에는 인권 문제를 다루는 전문 부서가 없다. 이는 단순히 조직체계의 부재 문제만이 아니다. 25년 동안 민주노총 내 많은 인권침해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조직이 갖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지 못하고 개인의 인성 문제로 치부해 집행부를 교체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것은 인권 옹호 책무가 집행부 개인이 아닌 조직의 책무로서 자리 잡고 운영원리로 자리매김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2002년 입사 2년 만에 노조 대의원이 됐다. 집회를 위해 방문한 회색빛 수용소 같은 본사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소는 지하 직원식당의 소위 ‘임원석’이라는 곳이었다. 회사 사장과 임원들은 소박하게(?)도 직원식당에서 함께 식사하기에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았다는 것이다. 노조 간부들조차 그곳에는 앉지 않았다.

“밥 먹는 것도 위아래가 있어요? 노조는 뭐해요. 저런 걸 놔두고.”

함께 간 후배가 말했다. 10년쯤 지난 2010년쯤 그 자리가 없어졌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는 왜 임원석 대신에 빨리 먹어야 할 사정이 있는 직원이나 식당 사용에 차별받을 수 있는 장애인 직원들을 위한 좌석을 만들지 못했을까. 꽤 오래 노조 간부를 하면서 이제야 생각해 본다.

얼마 전 산별노조 신임 채용직 간부들을 대상으로 인권 및 성평등 교육을 했다. 한 간부는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 산별노조에서 성소수자 집회에 연대하기 위해 참석한 사진을 지역 현장간부 사회관계서비스망(SNS) 게시판에 올렸더니 한 간부가 크게 항의했다는 것이다. 성소수자 혐오성 발언을 쏟아내고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SNS방을 나가고 노조 간부도 사퇴했다는 것이다. “노조가 순수하지 못하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노조 간부들은 모두 인권 감수성이 예민하고 인권지향적 사고방식을 가질 것이라는 예상에서 빗나간 사례다.

수년 전 산별노조의 연말 총회에 참석했는데 마침 올해 우수노조 시상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상패가 주어지고 사무처의 가장 젊은 여성 활동가가 축하 꽃다발을 전달했다. 행사 직후 중앙간부에게 “성차별적 모습으로 보인다”고 지적하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가는 것 같았다. 여성노동자가 다수인 청소노동자들의 노조에서도 위원장은 남성이고 여성은 주로 선전과 총무국장을 맡는다. 30년 전 얘기 같지만 여성과 남성에게 각각 적합한 직책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간부나 조합원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올해 12월 세 번째 민주노총 직선제 선거를 앞두고 있다. 깜깜이 선거 등 직선제의 많은 한계에도 집단 지성이 민주노총을 혁신할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믿는다. 민주노총에 인권위원회를 설치할 절호의 기회다. 혁신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권 옹호를 노조의 책무로 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바로 민주노총이 보수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국민 밉상 이미지를 벗어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캐나다의 공공노조(CUPE)는 매년 조합 가입이 늘고 다양한 사업을 펼친다. 이 노조의 연간 보고서를 보면 전체 예산 약 30%를 캐나다 인권보호 및 교육 사업에 사용한다. 지난해 6월 우연히 방문한 이 노조 게시판 메인 화면에 선주민의 날을 기념하고 이주민들의 야만적 착취를 반성하는 교육 동영상이 링크돼 있었다. 조합원 교육·행사를 예고하고 있었다. 산별협약으로 조합원 인권교육을 확보했고 별도의 인권교육센터를 설립해 조합원은 물론 가족까지 교육하고 있다.

호주와 뉴질랜드 노총은 가정폭력 피해자에 대한 유급휴일 보장을 임단협 핵심과제로 올려놓았다. 일부 관철시켰고 법제화로 나아갔다.

나는 노동의 계급적 특성이 당연히 사회 진보를 주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장 간부 20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조직 내 문화를 바꾸고 인권과 연대를 내면화하기 위한 기구 설치가 절실함을 느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뿌리는 전노협이라는 조직이다. 전노협의 정신은 조합원의 이익 창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총의 헌법적 책무를 그 실천에서도 가장 잘 담아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30년 전 탄생한 전노협이 꿈꾸던 평등사회는 개별화된 개인의 이윤 추구보다 공공선을 이루는 정신으로 계승되고 재해석돼야 한다.

민주노총의 인권위원회 설치를 시작으로 좀 더 현대화하고 세련된 평등사회 건설을 위한 민주노총이 탄생하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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