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153명. 지난 16일 정부가 발표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수다. 사랑제일교회 집단감염과 8·15 집회로 시작한 2차 대확산으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음식점·카페·PC방 등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공연예술계, 학교와 학원, 수많은 시민들의 삶이 멈췄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예외적 조치들을 대다수 시민들이 감내해야 했다.

코로나19가 만드는 2020년의 풍경이 더욱 을씨년스러운 것은 이 감염병이 시민의 기본적인 연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더 많이 대화하고, 더 자주 만나고, 더 크게 모여서, 스스로의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행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더욱 원자화된 개인으로 외로이 지금을 감내하는 것만이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연대라는 점에서 뼛속까지 무기력해지는 기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예외 상황을 극복할 정치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국 사회가 최근 보이는 예외적 관대함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공공성을 부정하고 자신만이 정책의 당사자라는 전문직의 단체 행동에는 그 어떤 이해당사자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존중을 보여줬다. 상가 세입자들의 강제 휴업에도 조물주 위에 있는 건물주의 임대료 수입은 신성불가침이라서 영향이 전혀 없다.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실업급여가 마치 나라 살림을 무너뜨리는 존재처럼 다뤄지더니, 600명을 정리해고 위협에 놓이게 하고 고용보험료 5억원도 안 낸 회사의 사실상 소유자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어떤 법적인 책임조차 없는 것 같다.

추석 전 지급을 추진한다는 재난지원금은 선별이냐 보편이냐를 또다시 반복하면서 지난 반년의 시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재난으로 발생한 경제적 피해도 제대로 파악하기는 커녕, 무엇을 위해 선별하는지 알 수 없는 찔끔 지원에 그쳤다. 노동시장에서 지위에 따라 여전히 선별적으로 고통 받고, 이를 방관하는 정치에 보편적인 무력감을 느낀다. 언젠가 올 거라고 들어왔던 코로나19 재확산보다도 절망적인 것은, 예외적인 방역조치를 뒷받침하는 사회경제적 조치가 하나도 예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고비를 넘기더라도 그 다음에도, 그 다음 다음에도, 사회 밖으로 내몰리는 사람은 정해져 있을 것 같다. 이를 또다시 방관할 것만 같다. 이런 게 반복되면, 모두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자 하는 예외적 조치들도 더 이상 견뎌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우리가 마주하는 예외적 상황은 코로나19뿐만이 아니다. 바다 건너 몇 달째 대륙을 태우고 있는 산불, 붕괴하는 남극의 빙하,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덮쳐 오고 있는 이런 예외들 앞에서 두려움과 무력감에 파묻히게 된다. 그동안 우리가 누려 왔던 것들조차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무력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과 무력감을 함께 짊어지는 정치가 잘 보이지 않는다. 과대포장으로 한숨이 나오는 통신비 2만원 논쟁이나 누굴 위한 건지 알 수가 없는 뉴딜펀드 이야기, 이렇게까지 다룰 정도로 중요한지 모르겠는 법무부 장관의 자녀 군복무 논쟁과 이를 방어한다고 나오는 실언들은 지금 정치가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치는 우리에게 쌓이고 있는 수많은 질문을 해야 한다. 노동시장 지위에 따라 더욱 확대하는 불평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재택근무 비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부담을 나눠야 하는지, 대도시의 삶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폭증하는 배달음식으로 늘어나는 플라스틱 배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코앞으로 다가온 기후 위기에도 석탄 발전은 계속될 수 있는지, 재난 앞의 고통은 어떻게 분담해야 정의로운 것인지.

우리가 지금 당장 재난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논의해야 하는 제도적 변화가 무엇인지 말해야 한다. 지금 정치가 가장 방치하고 있는 질문이고, 가장 필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필요한 설득과 실행을 해 나가는 그런 정치가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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