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베트남 인민해방전선의 전사 레지투이가 지난 6일 호치민시에서 숨졌다. 66년 17살에 고등학교를 나와 곧바로 전장에 뛰어든 그는 75년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함께 전쟁에 나섰던 친구 275명 가운데 살아남은 이는 단 5명이었다.

76년 베트남 <문예주간>에 시인으로 등단한 레지투이는 함께 싸우다 죽어 간 친구의 이름 ‘반레’를 필명으로 이후 45년의 삶을 이어갔다. 전쟁터에서도 틈만 나면 시집을 읽고, 시를 썼던 친구를 기억하며. 죽은 친구 반레의 이름으로 그는 82년부터 베트남 국립해방영화사의 시나리오작가 겸 감독이 됐다. 1천여편의 시를 22권의 시집과 10권의 소설집으로 출간했다. 20편 넘는 다큐멘터리 영화도 찍었다.

레지투이를 이 땅에 알린 건 한겨레신문이었다. 한겨레21은 99년 가을부터 베트남 캠페인을 벌였다. 이 끔찍한 전쟁에 뛰어든 우리가 베트남 국민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입혔는지 돌아보는 사죄의 캠페인이었다.

한겨레 캠페인에 참여한 방현석 소설가가 2002년 창비 겨울호에 반레의 이야기를 담은 중편소설 <존재의 형식>을 발표하면서 반레의 이야기가 알려졌다. 그즈음 반레의 자서전이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다. 반레는 한국 문인들의 초청으로 한국도 방문했다. KBS TV에 나온 반레는 여름이 지난 해운대의 가을 백사장에 맨발을 담근 채 모국어로 쓸쓸한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죽은 친구 반레를 기리듯.

베트남 전쟁은 퐁니퐁넛·미라이·하미·빈호아 등 수많은 마을에서 죄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낳았다.

미라이 학살사건을 특종한 세이모어 허시 기자는 소속도 없던 프리랜서 기자였다. 정보 계통으로 군 복무한 게 유일한 자산이었다. 반전운동에 몸담았던 한 변호사가 허시 기자에게 미군 하나가 미쳐서 수십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전했다. 허시는 미군 이름도, 마을 이름도, 날짜도 모르는 풍문에서 출발했다.

허시는 20개월의 추적 끝에 69년 11월 미라이 학살 사건을 폭로했다. 사실의 조각을 찾아 나선 허시는 베트남에서 다리를 잃고 귀국해 국방장관실에서 일하는 육군 대령을 만났다. 대령은 그에게 “빌어먹을 캘리라는 녀석이 내 허리도 안 오는 아이들까지 모조리 쏴 버렸다”고 했다. 이렇게 캘리의 이름을 확보했다. 계속 탐문 끝에 캘리의 변호사를 찾았다. 변호사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책상에 펼쳐진 문서를 거꾸로 읽어서 기록했다. 문서를 훔치거나 복사하는 간편한 불법 대신 합법을 택했다.

다음은 꽁꽁 숨은 캘리를 찾는 일이었다. 조지아주 포트베닝 기지에 근무하는 캘리를 확인하고 그의 숙소를 알아냈다. 캘리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건의 전모를 확인하고도 허시는 멈추지 않았다. 학살 현장에 있던 캘리의 부대원을 일일이 찾았다. 허시는 비행기와 고속버스로 미국 전역을 돌아 20개월의 추적을 끝냈다. 허시는 첫 기사를 놓고 여러 언론과 접촉했지만 작은 통신사 한 곳만 응했다.

허시가 쓴 미라이 기사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윌리엄 캘리 2세는 26살로 러스티라는 별명을 가진 부드러운 매너에 소년 같은 얼굴을 한 베트남전 참전 경력이 있는 육군 중위다. 미 육군은 캘리 중위가 68년 3월 핑크빌(미라이)로 알려진 베트콩 점령지역에서 수색과 파괴 임무를 수행하다가 최소 109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혐의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해 가고 있다.”

캘리의 부대는 비무장 민간인 504명을 학살했다. 173명의 어린이와 5개월 미만 유아 56명에, 17명은 임산부였다. 첫 기사가 나오자 30여개 유력 언론사가 받아썼고, 반전 여론이 폭발했다. 허시의 기사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도덕성을 잃었고 국제 지지는 무너졌다. 허시는 이 기사로 70년 퓰리처상을 받고 72년 뉴욕타임스에 스카우트돼 워트게이트 사건을 취재한다. 허시는 지금도 프리랜서 기자로 일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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