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숙 상임활동가

모든 물체는 고유한 진동이 있다. 그 진동이 서로 맞으면 ‘공명’을 해 소리를 낸다고 한다. 라디오의 주파수가 맞으면 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 어깨를 떨던 울음은 다른 눈물을 만나 우리에게 울림을 주곤 한다. 어쩌면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의 활동은 누군가의 들썩이는 어깨를 찾아가는 일이다. ‘다시는’ 가족들에게 산업재해 사망사건 소식은 활자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온몸으로 사건을 받아들이곤 한다. 고통의 진동을 듣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많다. 고통의 소리를 찾아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무어라도 하겠다며 몸을 움직인다. 그래서 아프다. 그래도 아픔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4월29일도 그랬다. 한낮에 발생한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현장. 여러 번 이어진 거대한 폭발음과 높이 솟아오른 불길 소식이 화면에 보도됐다. 소방대원들이 출동해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불길을 잡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가연성 물질인 우레탄폼 때문인지 노동자들이 미처 피하지도 못했는지 제자리에서 희생됐다는 소방대원의 말이 전파를 탔다. 쿡! 찌른다. 38명이 죽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형 산재사건이다. 건설현장이 그렇듯 희생된 노동자들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다. 이주노동자도 있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도, 신혼생활한 지 이제 겨우 한 달 된 사람도 있었다. 한익스프레스 유가족들이 사고현장으로 모여 밤을 지새우는 밤, 또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는 사람들…. 이전에 산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다.

“태규가 생각나서 한숨도 못 잤어요”

“태규가 생각나서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태규 때랑 똑같아요. 38명이라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끔찍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이게 노동자를 사람으로 보는 사회가 맞나요? 한 사람이라도 살아 주기를 얼마나 빌었는지 몰라요.”

고 김태규님의 누나 김도현씨는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 공사현장의 화재사건 소식에 가슴이 벌렁벌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잘 수도 없었다. 남의 일 같지 않다. 그의 동생도 건설현장에서 지난해 4월10일 허망하게 산재로 세상을 떠났다. 일용직이라 안전화도 지급받지 못하고 안전교육도, 안전장비도 받지 않은 채 일했다. 일하러 간 지 단 3일 만에 추락해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떨어진 곳은 안전점검도 받지 않은 승강기였다. 승강기에는 안전바도 없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도 전에 경찰은 이미 동생의 과실로 단정했다. 놀라웠다. 죽음의 책임조차 피해자에게 떠넘기려 하다니! 고 김태규님 사망사건에 대한 재판 심리 중 판사가 던진 어이없는 말마따나 “건설현장에서 노동자의 사망사고는 흔하다”. 흔해 빠진 죽음에는 애도도 존엄도 없다. 그저 늘어난 산재 숫자로만 취급된다. 안전불감증이 아니라 죽음에 무감한 사회가 흔한 죽음을 만든 건 아닐까. 공사기간 단축, 다단계 하도급구조, 불안정고용, 위험작업의 혼재 공정. 게다가 모든 게 비용으로 취급돼 안전장비나 교육은 없다. 건설노동자의 죽음을 흔하게 만든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책임의 부재. 모든 것이 원청시공사나 발주사가 책임을 회피하기 좋다. 그래서 건설노동자가 죽어도 한 치의 충격도 받지 않는다.

김씨는 혼자라도 이천 한익스프레스 화재현장에 가 보려고 했다.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옆에라도 있고 싶었다. 그의 동생이 산재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던 일이 떠올라서다. ‘다시는’ 성원들이 있는 단체 텔레그램방에도 김씨는 사고 현장이나 분향소에 갈 계획이 있으면 언제든 함께 갈 테니 계획을 세워 달라고 말을 건넸다. 사람들이 우선 현장 상황을 파악한 후 함께 내려가자고 했다.

‘다시는’에서 함께 활동하는 권미정 김용균재단 활동가가 사고현장에 내려갔다. 권 활동가는 이천에서 한익스프레스 유가족들과 이천시청 관계자, 이천지역 비정규직 활동가들을 만났다. 산재 피해 가족들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이천시 관련 공무원들을 만나 재난 상황 때 유가족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들과 관련한 매뉴얼을 전해 줬다. 그리고 ‘다시는’과 같은 산재유가족들의 모임도 있으니 언제든 지원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분향소를 가득 메운 영정들

5월2일 합동분향소가 차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는’ 가족들과 활동가들이 내려갔다. 이천고속터미널에서 멀지 않은 서희청소년수련관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는 그때까지는 외부인의 조문이 제한돼 있었다. 다만 ‘다시는’은 같은 산재유가족이므로 한익스프레스 산재유가족과 이천시는 조문을 권했다. 국화를 들고 10명이 무거운 공기와 국화꽃 향기와 향내만 있는 넓고 황망한 체육관에 들어섰다. 38명의 영정을 보며 한 명 한 명을 애도하는데 옆에서 곡소리가 나온다. 고 김태규님의 어머니 신현숙씨가 쏟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어떡해. 어떡해요. 이 안타까운 사람들….” 젊디젊은 영정 속 희생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들 태규가 떠올랐다고 했다.

아직 한익스프레스 유가족들은 현장검증을 하는 경찰과 검찰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유가족들은 경찰 수사발표를 들으러 사고현장으로 급히 이동했다. 상황상 한익스프레스 유가족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다음을 기약하고 올라왔다. 5월20일 다시 합동분향소로 갔다. 이번에는 조문만이 아니라 유가족들과 간담회도 했다. 분향소 한편에 마련된 유가족들 대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강석경씨, 김도현씨, 김미숙씨, 신현숙씨, 이용관씨가 함께했다, 고 김용균님의 어머니 김미숙씨가 “상황이 답답하시겠지만 굳게 마음먹고 싸우세요. 저도 용균이 사건 나고 처음에는 정신이 없었지만 주변에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이 있어 헤쳐 나갔다”며 위로했다. 이어서 신현숙씨가 말했다.

“저도 아들이 죽고서야 건설현장이 안전하지 않은 걸 알았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10년 전 40명이 죽은 이천 냉동창고 화재사건에서 사업주들이 낸 벌금은 고작 1인당 50만원이라고 들었습니다. 50만원의 벌금만 내는 나라에서 산재가 사라지기 어렵지 않습니까. 책임자를 처벌해야 반복이 안 됩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함께할 테니 연락 주세요. 그리고 저도 산재피해가족네트워크 ‘다시는’에 함께 하면서 많이 위로를 받았고 힘도 얻었습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신씨도 사건이 발생한 후 20일이 지난 후에야 김미숙씨를 만나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구의역 김군 사망 추모제 때 여러 유가족들을 만나며 위로를 받았다. 누구를 만나 어떻게 연대를 청하고 어디를 찾아가 따져야 하는지, 유가족들이 들려준 경험을 바탕으로 그도 아들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싸울지 어렴풋이 방향을 잡았다.

한 달 후 한익스프레스 유가족들은 영정을 들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기자회견을 청와대 앞에서 했다. ‘다시는’ 가족들이 함께했다. 경찰의 조사 결과 발표 이후 책임자 8명에 대해 법원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어서 53일 만에 영결식이 치러졌다. 영결식을 보며 생각한다. 언제쯤 건설현장의 죽음은 흔해지지 않을 것인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 (saltomo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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