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고은 기자
유성기업이 노동자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대법원에 5년째 계류 중인데, 금속노조 유성기업아산·영동지회가 선고를 미뤄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사가 손배 소송 철회를 두고 잠정합의한 만큼 교섭이 타결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최근 대법원은 쟁점 검토에 나서며 선고기일을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성기업아산·영동지회와 시민·사회단체는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성기업은 이미 손배소를 유지하겠다는 의사가 없다고 공표했다”며 “대법원은 교섭이 타결될 때까지 판결을 미루거나, 선고를 내려야 한다면 파기환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산·영동지회와 유성기업에 따르면 지난해 10월31일 노사가 합의한 잠정합의안에 양측을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소송 철회가 포함돼 있다. 다만 ‘노조파괴’주범 퇴진과 단체협약상 징계조항 등의 쟁점이 남아 타결에는 이르지 못했다. 노사갈등 9년 만에 합의를 이루게 된 배경에는 지난해 유시영 유성기업 전 대표이사의 법정구속이 있다. 유 전 대표는 당시 배임·횡령 혐의로 구속됐는데, 이후 회사가 태도를 바꾸며 협상에 속도가 붙었다.

이견을 좁히지 못한 노사는 평행선을 달리다 지난달 간담회 형식의 교섭을 진행했고 8월부터 집중교섭에 나설 것으로 전해졌다. 이정훈 유성기업아산지회장은 “손배소 철회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회사도 동의한 상황”이라며 “이런 가운데 대법원 선고가 나는 게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2011년 유성기업은 지회가 벌인 쟁의행위로 인해 업무방해와 영업손실을 입었다며 지회와 조합원 87명에게 40억원대 손배 소송을 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모두 지회와 조합원의 책임을 인정했다. 2013년 1심에서는 12억1천800만원, 2015년 2심에서는 10억1천100만원을 손해배상액으로 판결했다. 현재 대법원에 계류된 상태로 지연이자까지 합쳐 손배액이 20억원대로 늘어났다.

지회와 시민·사회단체는 애초 회사가 낸 손배 소송이 손해를 보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노조파괴’ 수단으로 악용돼 왔다고 지적했다. 지회에 따르면 창조컨설팅 노조파괴 문건에 손배·가압류 청구를 노조파괴 최후수단으로 사용한다고 명시돼 있다.

김상은 변호사(법률사무소 새날)는 “1심 때 피고에 포함돼 있던 사람들 중 금속노조에서 기업노조로 이동하거나 탈퇴한 조합원들에 대해서는 회사가 항소하지 않았다”며 “어용노조인 기업노조 확대전략 차원에서 손배 소송이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소송 대상은 1심 때 87명에서 항소심에서는 34명으로 줄어들었다.

손배 소송이 ‘노조파괴’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를 막기 위해서라도 법·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윤지선 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손잡고) 활동가는 “1994년 대구 동산의료원 사건에서 대법원이 불법파업이라 사용자가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결한 최초의 손배·가압류 판례가 그 이후로 계속 인용돼 왔다”며 “사법부가 기존 판례를 뒤집는 판결을 내리기까지 기다리기보다 노동 3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게 더 빠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합법적 파업의 범위를 넓히는 내용을 담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안은 19·20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별다른 진전 없이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2017년 10월 UN 사회권규약위원회는 한국에 “합법파업의 요건을 완화해 파업권이 효과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21대 국회에서 지난달 19일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해당 내용을 담은 노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지선 활동가는 “입법안 마련을 위해 법·제도개선위원들이 모여 논의하고 있다”며 “21대 국회에는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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