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훈녕 공인노무사(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어느 정부출연구기관 이야기다.

여느 기관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는 적지 않은 비정규(기간제) 노동자들이 채용돼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에서 ‘상시·지속적 업무의 정규직 전환’을 원칙으로 하는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에 맞춰 연구기관은 정규직 전환 절차를 준비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연구원이 설정한 정규직 전환 대상 범주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연구원은 ‘상시·지속적 업무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원칙을 수용하되, 이른바 상시·지속성의 기준을 ‘정부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발표 시점 이전에 계약갱신을 했는지 여부’로 잡았다. 가이드라인이 발표되기 전에 계약갱신을 1회라도 한 노동자의 경우 상시·지속적 업무를 수행하는 노동자로, 그렇지 않으면 일시·간헐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이드라인이 발표되기 전에 계약갱신을 1회 이상 한 연구원들(1그룹)은 상시·지속적 업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 분류돼 절대평가를 거쳤고, 결과적으로 90%가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반면 가이드라인 발표 전 계약갱신을 하지 않았던 연구원들(2그룹)은 일시·간헐적 업무를 수행하는 집단으로 평가돼 내부 제한 경쟁채용을 해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30%만이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그런데 과연 ‘(특정 노동자가) 정부의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발표 전에 계약갱신을 했는지 여부’는 업무의 상시·지속성을 평가할 수 있는 올바른 기준일까. 참고로 해당 연구기관은 정부나 민간이 위탁한, 종기(終期)가 정해져 있는 프로젝트 연구·기술개발 사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곳이다. 운영 재원의 70% 이상이 위탁받은 프로젝트 사업에서 나올 정도였다. 아마도 연구원은, 위와 같은 상황을 고려할 때 복수의 프로젝트를 반복해서 수행한 경우라면 상시·지속적 업무를 수행한 사람으로 볼 수 있고, 하나의 프로젝트만을 했을 뿐이라면 해당 프로젝트만을 위해 채용된 사람으로 본 것 같다. 즉 해당 프로젝트가 종료되면 근로계약 역시 종료될 사람이기 때문에 일시·간헐적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2그룹으로 분류된 후 정규직 전환에 탈락한 사람들은 이 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정 노동자가 가이드라인 발표 전에 계약갱신을 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 특정 노동자가 수행한 업무의 내용이나 성격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노동자가 계약갱신을 한 시점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실제로 상시·지속적 업무에 종사했다고 하더라도 정부 가이드라인 발표 시점 이전에 계약갱신을 한 내역이 없다면, 결국 일시·간헐적 업무에 종사한 노동자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실제로 해당 연구기관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연구원의 업무 내역에서 별다른 차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통상 정규직 연구원은 고정적이고 장기적인 연구를, 비정규직 연구원은 일시적인 프로젝트 연구를 담당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연구원은 전체 업무에서 프로젝트 사업 비중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 여러 프로젝트를 배정받아 동시다발적으로 수행했다. 아니면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다른 프로젝트를 연이어 배정받아 수행했다. 계속적인 프로젝트 연구 배정·수행 그 자체가 이 연구원에 있어서는 상시·지속적 업무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2그룹으로 분류돼 정규직 전환 절차에서 탈락했다가 근로계약 기간이 만료된 사람들 중 일부가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넣었다. 일정한 요건을 거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권이 인정되는 상황에서 사용자의 합리적이지 못한 기준 설정 때문에 정규직 전환에서 탈락했다. 이후 사용자는 계약기간 만료만을 이유로 근로계약 종료를 통보했는데, 이는 부당해고나 마찬가지라는 것이 요지였다. 지노위는 이들의 손을 들어줬다. 일부는 지노위와 중노위에서 연이어 부당해고를 인정받아 복직됐다. 또 일부는 지노위에서 부당해고를 인정받았지만 사측 불복으로 중노위 재심 단계를 밟고 있다.

연구원은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일 뿐, 구체적인 정규직 전환 계획을 수립할 때는 사용자에게 재량이 적지 않게 인정되므로 위 기준 또한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글쎄다. 사용자 재량에도 한계는 존재한다. 재량은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행사돼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해당 연구원을 상대로 제기된 부당해고 구제신청에서 노동위가 판정을 통해 밝혀 온 바다. 남은 사건에서도 이러한 노동위 입장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란다.

재량 행사가 합리적이라고 판단될 수 있는 범위가 명징하게 드러나는 것이 당장 계약기간이 만료된 비정규직 연구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정규직 전환 계획 수립’이라는 매우 까다로운 방정식을 풀어 나가야 할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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