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정건 선생의 죽음을 알리는 1933년 1월11일자 동아일보 기사.<공훈전자사료관>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친일파 숙부를 떠나 독립운동가로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 날> 그리고 장편소설 <무영탑> <적도>의 작가 현진건은 우리 모두 잘 알지만 독립운동가 현정건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정건(玄鼎健, 1893~1932)은 현진건의 친형으로 중국 상해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다.

현정건은 평생을 하급관리로 지낸 아버지 현경운과 어머니 완산 이씨 사이의 5남 중 셋째로 1893년 6월2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둘째 형 석건(1882년생)은 일본 명치대 졸업생으로 판사가 됐다가 변호사로 일했으며, 바로 아래 동생 현진건(1900년생)은 소설가였다.

현정건의 숙부 현영운은 유명한 친일파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민족 반역자로 악명을 떨친 배정자의 재혼남편이었다. 현정건은 13세 때 고향인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친일파 숙부 현영운이 최고의 권세를 누리고 있을 때 이 집에 기거하면서 배재학당을 다녔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후반기의 현정건은 을사늑약과 군대해산의 충격, 애국계몽 논객들의 분노에 찬 호소와 우국지사·의병들의 목숨을 건 애국투쟁을 보면서 친일파 현영운과 배정자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던 것 같다.

현정건의 6촌 재종형 현상건은 고종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실력자였는데 숙부 현영운이 친일파였던 것과 달리 친러파였다. 1903~1904년 대한제국의 대러시아 외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던 그는 러일전쟁을 예견해 국외중립론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친러파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자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한 집안에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공존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친일파 권세가 숙부 집에서 기거하면서 학업을 이어 갔던 현정건에게 결단을 재촉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임시정부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

현정건은 18세 되던 1910년 두 살 아래의 윤덕경과 결혼했는데 바로 그해 아내를 남겨 두고 홀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독립운동을 위한 것이었는지, 결혼에 대한 불만이었는지, 아니면 국망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고 느낀 답답함 때문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상해에서 현정건은 한동안 6촌형 현상건과 함께 지냈으나 후에 떨어져 나왔다. 상건은 과거의 반일의지가 약화된 반면 정건은 항일투사로 변모해 갔기 때문이다. 1918년에는 동생 현진건이 상해에 와서 호강대학 독일어 전문부를 약 1년간 다니다가 귀국했는데 이때 진건은 형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2월께 현정건은 서울로 잠입했다가 경찰에 체포됐으나 3월 중순께 석방됐다. 정건은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실패한 뒤 7월 상순께 만주 길림(吉林)으로 탈출, 다시 상해로 갔다. 현정건은 임시의정원 6회 회기(1919년 8월18일~9월17일) 중에 경상도 의원으로 잠시 선출됐다. 현정건은 상해에 일찍부터 거주해 현지 사정에 밝았기 때문에 독립운동계에도 일정한 지명도가 있었던 것이다.

현정건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1920년부터 이동휘·김립 등과 연결됐고 1921년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 초 이동휘가 조직 쇄신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무총리직을 사퇴하고 임시정부를 탈퇴할 때 함께 임시정부를 탈퇴했다. 현정건은 1921년 5월20일부터 23일까지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당대회에 상해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이때 ‘혜성(彗星)’이라는 필명으로 국한문 활자판 주간지 ‘화요보(火曜報)’의 주필로 활동했다.

한편, 1919년 4월 국내외의 큰 호응과 기대 속에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위상이 급속히 하락했다. 1921년부터 비판세력이 제기한 국민대표회의 소집론 등 ‘개조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으며, 1922년 12월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기로 했다. 고려공산당은 이 대회에 현정건·왕삼덕을 대표로 파견했다.

1923년 1월3일부터 6월7일까지, 총 74회에 걸쳐 국내외 지역 독립운동단체 대표 1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됐다. 영어와 중국어·러시아어·일본어에 능통했던 현정건은 2월5일 열린 외교분과위원회에서 여운형·윤해 등과 함께 외교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5개월 동안 이어진 국민대표회의는 국내외 각지에서 모인 명망가들이 치열한 논쟁을 거듭했지만 뚜렷한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임시정부 개조운동에 적극 관여

국민대표회의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산한 뒤 현정건은 1923년 7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 가담하는 등 임시정부 분파 사이의 이견 조정을 위해 노력했다. 현정건은 10월4일 민족운동의 통합과 단결을 위한 목적으로 조직한 청년동맹회에서 11명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됐다. 1925년 4월 2차 정기총회에서는 김상덕·윤자영 등과 함께 7인 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신설된 조사부 요원으로 선임됐다. 현정건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에게 예를 표하고 공경하겠다는 뜻을 담은 현읍민(玄揖民)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 무렵 임시정부에 다시 합류해 혁신을 위해 노력했다.

1924년 7월 현정건은 윤기섭·윤자영·엄항섭 등 20명의 임시의정원 의원과 함께 한국독립당대표회의 소집, 법제 개정, 정무 쇄신 등을 제기했다. 의정원의 요구는 이승만 지지파의 거부로 진통을 겪다가 1925년 3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결정으로 성과를 봤다. 임정은 박은식을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3월30일 2차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개정 헌법에 따라 1925년 9월24일 이상룡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선출됐으나 혼란상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1924년 6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은 상해 인성학교(仁成學校)에 예비강습소를 설치했는데 현정건은 김규식·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를 담당했다. 1925년부터 중국 국민혁명 열기가 고조되면서 학생들이 중국 혁명의 본거지인 광저우(廣州)로 몰려들었다. 중국 혁명정부는 1926년 중국사정연구회를 조직해 이들 학생들에 대한 심사를 진행했는데, 현정건은 그 집행위원으로 선임돼 조선청년들의 중국 대학 및 군관학교 입학 주선과 자격심사를 주관했다. 그가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그의 교육 역량과 인품이 주위 널리 알려진 때문이었다.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에 적극 관여

임시정부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도 계속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26년 이후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됐다. 현정건은 1927년 4월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10월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연합회의 집행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그러나 4월12일 장제스의 반공쿠데타로 국공합작이 파탄 나고 공산주의자가 체포되는 등 독립운동 상황이 급변했다.

한인 사회주의운동에도 심각한 난관이 닥쳐 왔다. 일제는 상해 프랑스 조계 내 한인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기 위해 중국 경찰과 프랑스 조계 경찰, 일본 영사관 경찰의 3자 합동 단속을 주도했다. 1927년 6월30일 20여명의 프랑스·중국·일본 3국 합동경찰이 프랑스 조계지역을 수색하며 현정건을 비롯해 여운형·김종상·김철·최석순 등의 집을 수색했다. 다행이 현정건 등은 체포되지 않았으나 위험한 상황이 계속됐다.

프랑스 조계는 비교적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 관대했으나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 1928년 3월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조를 받아 진행된 일본 영사관 경찰의 수색 과정에서 현정건은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현정건은 국내로 압송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일제는 현정건이 민족유일당 촉성운동에 적극 가담한 사실을 중시해 심하게 취조했다.

40세 나이로 독립운동가의 생을 마감하다

현정건은 1928년 11월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장성·황의춘 등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현정건의 민족유일당 사건은 같은해 4월 상해에서 체포된 변장성 등의 ‘한인청년회 사건’과 함께 ‘상해 사건’으로 분류됐다. 이때 최창조 등 신의주 변호사 3명과 함께 친형인 현석건 등 진주변호사 2명이 함께 변호를 맡았다.

현정건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12일에 신의주지법은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는 항소했으나 1929년 6월10일 평양법원 복심재판에서 원심이 확정됐다. 현정건은 처음 구속될 때부터 따지면 4년3개월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6월10일에 만기 출옥했다. 하지만 감옥살이의 후유증 끝에 복막염이 발병해 12월30일 경성의전 병원에서 돌연 세상을 떠났다. 향년 40세였다.

한편,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은 남편이 죽은 뒤 식음을 전폐하다가 끝내 2월10일에 “(남편 없이는)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 달라”는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고, 부부로서의 생활도 거의 없었다. 결혼한 해에 중국으로 떠난 뒤 22년만에 돌아온 남편과 겨우 5개월 만에 사별한 윤덕경의 심경이 어떠했을까? 더욱이 현정건에게는 ‘혁명동지’이자 ‘제2의 부인’이었던 ‘사상기생’ 출신 현계옥이 있었으니, 그의 삶이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현정건은 1910년 상해로 망명한 이래 20여년간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초지일관 독립운동의 한길을 걸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배타적 계급노선에 매몰되지 않았고, 임시정부 개조와 민족유일당운동 등 민족운동의 통합을 위해 핵심 역할을 했다. 분투하는 현정건의 모습은 아우 현진건에 의해 장편소설 <적도(赤道)>에 생생하게 그려졌는데, 이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당시 현정건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치열한 실천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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