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8.6 목 11:18
상단여백
HOME 칼럼 연재칼럼 민변 노동위의 노변政담
일로 만난 사이손명호 변호사(법무법인 오월)
▲ 손명호 변호사(법무법인 오월)

선배 변호사가 수행하는 집단소송 재판을 참관한 적이 있다. 근로자들을 대리해 원청 회사에 근로자지위확인을 구하는 사건이었다. 법정 안에는 서 있을 공간도 없이 수십여명의 원고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원고들은 변호사의 말 한마디, 판사의 숨소리조차 놓칠 수 없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긴장감 넘치는 변론을 마치고 법원 건물을 나섰다. 수십여명의 원고들이 우르르 선배 변호사를 따라 나가 둘러섰다. 선배 변호사가 조용히 가방을 내려놓고 벤치 위에 올라서자 소란스러웠던 주변에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그때 선배 변호사가 나지막이 얘기했다. “여러분 자꾸 사무실로 전화하지 마세요. 필요하면 전화는 변호사가 합니다. 의뢰인은 변호사한테 전화하는 거 아니에요.”

의뢰인한테 전화하지 마라고 엄포를 놓는 변호사라니. 충격과 혼돈의 순간이었다. 경외심마저 들었다. 어쨌든 선배 변호사는 그 사건을 전부 승소했고 원고들은 모두 만족했을 것이다.

변호사로서 나는 꽤나 친절한 편이다. 의뢰인이 다소 장황한 이야기를 해도 열심히 듣는다. 사건과 무관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혹시나 힌트가 있을까 싶어 들어 본다. 낮이고 밤이고 전화가 오면 받는다. 그러다 보면 상담시간은 길어지고 집중해서 하던 일은 도중에 끊긴다. 또 야근이다. 그럼에도 어려운 사건일수록 해결의 실마리는 의뢰인에게 있다고 믿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친절한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사건을 수임한 다음 날 아침, 회의 중이라 의뢰인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러자 바로 사무실로 전화해 재차 찾는다. 10여분 뒤 회의를 마치고 전화를 드리자 다짜고짜 소리를 지른다. 내가 내 돈 주고 산 변호사가 왜 전화를 바로 받지 않느냐고. 물론 의뢰인에게 급한 용건은 없었다.

한 번은 중앙노동위원회가 해고가 정당하다고 한 판정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대리해서 1·2·3심을 전부 승소했다. 착수금은 무료였고 성공보수는 패소한 피고가 부담하는 소송비용액에서 충당했다. 부당한 해고임이 확정됐음에도 회사가 해고기간 동안 임금상당액을 지급하지 않자 분노한 의뢰인이 소리쳤다. “소송을 다 이겼는데도 내 손에 들어온 돈은 왜 이것밖에 안 되냐? 대체 변호사랍시고 한 게 뭐냐.” 중노위 재심판정취소 소송은 행정소송이라 회사에 해고기간 임금상당액을 청구(강제집행)하려면 민사소송을 새로 제기해야 한다고 설명하자, 또 수임료를 내야 하냐며 사기꾼 보듯 했다.

한 의뢰인의 크고 작은 징계사건을 맡아 운 좋게도 여러 건을 전부 승소했다. 회사는 급기야 의뢰인을 해고했고 해고 사건을 맡아 1심을 이겼다. 1심 법원은 다섯 가지 징계사유 중 네 가지를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2심에서 뒤집어졌다. 다섯 가지 징계사유 중 세 가지는 부당하나 나머지 두 가지 징계사유만으로도 해고가 정당하다고 봤다. 수긍하기 어려운 법리해석이 있었고 우리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2심에서 승소한 회사가 합의를 제안했다. 고용관계를 종료하는 대신 수천만원의 합의금을 주겠다고 한다. 대법원에서 승소하면 모든 것을 얻지만 패소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정년에 가까운 의뢰인에게 수천만원의 합의금은 가볍지 않았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해 놓고 회사측과 수차례 협의를 거쳤다. 의뢰인은 합의로 끝나는 경우에도 성공보수를 줘야 하는지 물어 봤다. 그렇다고 답했다. 며칠 후 의뢰인은 갑자기 신뢰가 깨졌다며 사임해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서운하고 섭섭했던 감정들을 쏟아 놓았다. 함께한 다른 여러 사건에서 전부 승소했고 모든 서면을 공유했다. 쟁점과 상관없는 자신의 십수년 전 억울한 사정까지 귀가 닳도록 들어 줬다. 그런데도 서운하고 섭섭하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의뢰인이 원하니 사임했고, 일주일 후 의뢰인은 상고를 취하했다. 변호사에게 성공보수를 주게 되면 자기 몫이 줄어드니 사임시켜 놓고 회사와 단독으로 합의한 것이었다. 수년 동안 같은 편으로 함께 쌓아 온 신뢰는 그날 무너졌다.

흔히들 변호사를 “산다”거나 “쓴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변호사는 의뢰인이 시키는 대로 쓰는 대필가도 아니고, 억울함과 분노를 쏟아 내는 갑질 대상도 아니다. 의뢰인과 변호사의 관계는 내 일을 믿고 맡기는 위임관계다. 위임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비록 일로 만난 사이라도 선의와 신뢰가 생겨날 수 있다고 믿는다. 친절한 마음에 생긴 상처는 반드시 아물고 말 것이다.

손명호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손명호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