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미국 프리스턴대 이사회가 지난달 27일 ‘우드로 윌슨 공공국제문제 스쿨’로 부르려 했던 국제관계대학원 이름에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을 빼기로 했다.

윌슨 전 대통령은 1913~1921년 재임하면서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지금의 유엔인 국제연맹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우리에겐 망명 정객 이승만과의 교우가 잘 알려져 있다.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이 내건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에 매료돼 식민지 속박을 외교로 풀려고 나섰다.

하지만 윌슨은 프리스턴대 총장이던 1902~1910년 이 대학에 흑인의 입학을 금지하고 백인 우월주의 단체 큐클럭스클랜(KKK)을 지지했다. 윌슨이 백인 우월주의에 절어 있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최근 흑백 갈등이 재연되면서 새롭게 부각됐다. 미국 초기 지도자 대부분이 이런 사람이다.

수만 년 동안 인디언이 살던 땅에 이주해 온 백인과 흑인이 만들어, 300년 남짓한 역사를 가진 미국이 인종차별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주민이 만든 나라, 미국에서 이주민이 차별받는 이상한 풍습은 이런 ‘미국의 아버지’들의 죄상과 단절하지 못해서다.

메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미 국무부 입법담당 차관보가 지난달 18일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대응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실망해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사직서를 냈다. 테일러는 트럼프 정권의 첫 흑인 여성 차관보였다.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만큼 보수주의자인 테일러는 “대통령의 최근 언행이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크게 어긋난다”며 사퇴했다. ‘최연소’ ‘첫 흑인 여성’이란 타이틀을 달고 살았던 테일러마저 트럼프에 등을 돌렸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자들은 트럼프의 공화당만 비난하는 게 아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을 포함해 민주당 지도부가 지난달 8일 경찰 폭력에 희생된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면서 목에 둘렀던 ‘켄테(kente)’ 논란도 뜨거웠다. 켄테는 기원전부터 생산된 아프리카 가나 지역의 전통 스카프다. 가나는 과거 미국과 유럽이 저지른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다. 흑인 시위자들은 “홍보에 매달리는 미국 정치인들이 2020년 공연(대선)에 쓰라고 우리 조상이 켄테를 만든 게 아니다”고 민주당의 소품 이벤트 정치를 비난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영국 옥스퍼드대는 로즈 장학금을 만든 세실 로즈(1853~1902) 동상을 철거키로 했다. 세계적 권위의 장학재단을 만든 그의 동상이 세워진 지 109년 만의 일이다. 로즈는 19세기 말 남아공 일대의 식민지 케이프 총독을 지내며 광산을 개발해 모은 재산 대부분을 모교 옥스퍼드에 기증해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로즈 장학재단은 해마다 영연방국가와 미국·독일의 젊은이 100여명을 뽑아 옥스퍼드에서 무료로 공부할 기회를 준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로즈 장학생이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빗발치는 동상 철거 요구에 옥스퍼드대가 오랜 침묵 끝에 응답했다.

거리의 민심은 본질을 꿰뚫는다. 미국 민주당은 조지 플로이드 사망이 다가오는 대선에 호재라는 계산하에 시위에 호응하는 척하지만, 시위대는 민주당도 300년 흑백 갈등으로 잇속을 챙긴 집단임을 잘 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투사들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을 놓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글을 퍼 나르며 전투를 치르지만 코로나19로 파탄난 가난한 서민들 가슴엔 어떤 울림도 여운도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선이고 미래통합당은 악이라는 이분법은 역사 발전에 어떤 도움도 안 된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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