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노동운동 안팎에서 많은 질문을 받았다. 그중 하나, 옛 동지의 전화였다. 전노협과 금속연맹 시대를 함께한 동지였다. 2005년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폭력사태를 겪으며, 노동운동 내부에서 서로 이래도 되는 거냐고 괴로워하다 떠난 뒤로는 조용하게 살며 생계에 여념이 없는 동지였다. 오랜만의 반가운 목소리에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은 뒤에 옛 동지가 대뜸 말했다. 민주노총은 아직도 그러고 있냐고 했다. 아직도 세상이 선동과 물리력의 시대인 줄 아느냐고도 했다. 민주노총 위원장의 출근을 가로막고 회의를 무산시키는 광경의 뉴스를 보다가 속이 상했고, 옛날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나 하소연할 곳을 찾다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무척 화가 나 있었다. 광화문에서 자기들끼리 멱살 잡고 싸우던 태극기부대와 비교하기도 하는 등 듣기 거북한 얘기도 있었으나, 상처받고 떠난 옛 동지의 그래도 애정 남은 분노라서 듣기만 했다.

부족하더라도 합의안을 승인해야 한다

노사정 합의에 격한 반발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처음에는 뭔가 결정적 하자가 있는 것으로 짐작했다. 그리고 합의안을 구해서 봤다. 답답했다. 왜 이것밖에 못했나 양대 노총 교섭위원에게 화가 났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면서 화를 가라앉힌 뒤에 다시 읽었다. 노동을 팔아먹은 내용이나 함정은 없는가에 초점을 맞춰 한 조항 한 조항 밑줄 긋고 메모하면서 읽었다. 그런 조항은 없었다. 또 읽었다. 그래도 없었다. 잘못 본 것일 수 있어서 전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물었다. 한결같이 없다고 했다. 얼마 뒤, 대의원대회 소집을 반대하는 일부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 성명을 받아 읽어 봤다. 거기에도 노동을 팔아먹었다는 비판은 없었다. 반대 성명의 골자는 “해고를 막고, 실직자의 생계를 보장하고, 문턱 없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자는 내용이 제대로 담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합의안이 부족하다는 비판이었다. 내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결론의 방향이 달랐다. 그들은 부족하니까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고, 나는 부족하더라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위기가 밑바닥으로 집중되는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합의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폐기를 주장하는 것은 조합원과 사회를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밑바닥 처지에서는 노사정 합의가 절실하다

코로나19로 생계위협에 내몰린 밑바닥 소외계층이 100만명을 넘었다. 노조 바깥에서 그들이 겪는 기이한 풍경을 소개한다. 코로나19로 일감이 없어진 중소기업이다. 재벌이나 공공기관이 원청도 아니다. 사장은 숙련된 기술력과 정붙이고 일하던 관계가 아쉬워 당분간의 무급휴직을 제안한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차라리 해고해 달라고 부탁한다. 투쟁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은 지불능력이 없는 데다, 투쟁한다고 해서 일거리가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서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코로나19 휴직보다 실업급여를 받는 것이 가족의 먹고사는 문제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자진 퇴사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다. 결국은 노동자들의 희망대로 해고 처리되고, 사장과 노동자는 소주잔으로 쓰린 속을 달랜다. 노조 안에서 보면 어처구니없는데, 슬프게도 이것은 해피엔딩이다. 사장이 해고를 거부하면, 휴직을 받아들이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자진 퇴사할 수밖에 없는 두 수렁 중의 하나를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해야 한다.

전체 노동자 절반의 연소득은 3천만원이 안 된다. 월 250만원이 안 된다는 얘기다. 해고가 혜택이 되기도 하는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노조 바깥의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다. 바로 그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판단이다. 노사정 합의안의 ‘1장 고용유지를 위한 정부 역할 및 노사 협력’만으로도 민주노총은 합의를 반드시 승인해야 한다. 그들은 당장의 생계가 다급하다. 제발 노조 바깥의 밑바닥 처지를 헤아려 줄 것을 민주노총 대의원들에게 간곡하게 호소한다.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서도 합의를 승인해야 한다

최저임금은 주장만으로 올릴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국민임투라 하면서도 그동안의 최임투쟁에 얼마나 형편없이 참여했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밑도 끝도 없이 투쟁만 주장하는 정파도 마찬가지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19로 경제가 심하게 위축됐다. 사회를 설득하고 정부를 움직일 협상력과 정치력이 결정적 변수다. 한국노총만으로는 버겁다. 민주노총이 코로나19 노사정 합의를 거부하는 순간, 민주노총은 사회적 협상력과 정치력을 모두 잃는다. 정부든 사회든 민주노총 주장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생산과 소비가 줄어든 상황에서, 최저임금 인상은 밑바닥 일자리를 도리어 빠르게 많이 없앨 수 있다. 양대 노총은 사회연대기금을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후유증 극복에 지원하겠다고 제안해야 한다. 그러면서 재벌의 사내유보금도 풀라고 사회와 함께 압박해야 한다. 그래야 최저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인상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코로나19 합의를 거부하면, 사회는 민주노총의 제안을 신뢰하지 않는다. 민주노총이 노사정 합의의 주체가 돼야 하는 이유다.

민주노총에는 반대 이후 대안이 없다

합의를 반대하는 몇몇 동지에게 대안이 뭐냐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솔직하게 답해줘서 고마웠다. 코로나19 때문에 소규모 집회도 쉽게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대규모 집회는 서울시가 막는 측면보다, 감염 우려에 대한 조합원과 국민 반발이 더 심해서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얼마 안 있어 민주노총은 위원장과 지역본부장 선거에 돌입한다. 공공운수노조를 비롯한 여러 산별도 선거에 돌입한다. 여름휴가가 끝나면 선거철이 본격 시작될 것이다. 물밑은 벌써 여기저기 들썩대고 있다. 민주노총 선거철에는 투쟁이든 뭐든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다. 선거 말고는 관심이 없다. 아니 조합원은 이제 선거조차 관심이 없다. 그래서다. 합의안 반대를 주장하는 동지들도 대안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대안이 없다면, 합의안을 수용해야 한다. 노동을 팔아먹은 합의안이 아닌데도, 아무런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밑바닥 노동에게는 노사정 합의안의 빠른 시행이 절박하다. 당장 가족이 연명해야 할 삼시 세끼란 말이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일이다.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대신 산입범위를 확대하는 문제에서, 상여금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최저임금 직접 대상은 상여금이 거의 없었다. 있어도 상여금보다 교통비와 식대 등이 더 많았다. 그런데 민주노총은 정파 반발이 두려워 합의하지 않았고, 그 결과 상여금에 교통비와 식대 등 복리후생비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밑바닥 노동자의 임금을 더 많이 빼앗기도록 방치하는 꼴이었다. 그래 놓고 민주노총은 비판 성명 내는 것으로 끝내고 말았다. 어떤 정파도 투쟁에 나서지 않았다. 예수가 죽임당할 때의 빌라도처럼, 우리는 산입범위 확대에 반대했다는 알리바이만 남겼다. 민주노총은 빌라도 알리바이 그만해야 한다.

멋지게 논쟁하고 멋지게 승복하자

노동자 상·하위 10%의 격차가 6배까지 벌어지는 노동 내 심각한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뜻으로 각종 통계와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사회연대전략을 주장해 왔다. 상하 두 계층으로 분단된 노동계급을 복원하기 위한 운동의 백가쟁명을 바란 뜻도 있었다. 그랬는데 돌아오는 것은 험악한 쌍욕이었다. 정파의 공식 문서에까지 자본의 앞잡이라는 둥 바이러스라는 둥 손모가지를 끊어야 한다는 둥 유치하기 짝이 없는 비아냥이 넘쳤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향해 구좌파라는 표현을 썼다. 그랬더니 노동운동 안팎의 여러 지인이 그러지 말라고 했다. 왜 내 발목만 잡나 싶었지만, 일리 있는 얘기였다. 수많은 사람이 논쟁 추이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쌍욕과 유치한 표현 따위에 현혹되지 않는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라 했다. 나도 사람인지라 또 흔들릴 수 있겠지만, 조언을 따르겠다고 했다. 상대가 아무리 극악하게 욕을 하고 유치하게 비아냥대도 씩 웃으면서 멋진 논쟁을 기다리기로 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 논쟁도 마찬가지다. 대의원대회까지 각자가 최선을 다해 설득력 있는 논쟁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볼썽사나운 꼴이 이미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지금부터라도 멋지게 논쟁하고 멋지게 인정하는 민주노총 모습을 펼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