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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휴일> 따라잡기
▲ 최재훈 여행작가

어린 시절의 로마는 벤허와 멧살라의 전차 경주와 콜로세움 속에서 죽음의 전투를 벌이던 스파르타쿠스, 불타오르는 로마를 바라보며 광기를 뿜어내던 네로 황제가 전부였다. 제국으로서의 로마라는 틀에 딱 박힌 이미지를 한 방에 깨뜨려 준 것이 바로 영화 <로마의 휴일>이었다. 어느 방송국인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시절 어느 일요일 낮시간이었던 것 같다. 주로 흑백 고전 영화를 상영해 주던 이 프로그램을 통해 인생 더없이 칙칙했던 고등이는 <가스등>·<철도원>·<사이코> 같은 명작 중의 명작들을 맥락 없이 접했다. 칙칙한 고교 생활만큼이나 영화들도 칙칙했던 차였다.

그때 한줄기 빛처럼 내려온 선물이 <로마의 휴일>이었고, 오드리 헵번이었다. 한마디로 강림의 순간이었을 터. 이 영화를 통해 나는 비로소 고대 로마에서 탈출해 현대 로마에 다가설 수 있었다. 물론 당시로 봐도 30년 전 로마였지만, 네로 황제 시대에 비하면 거의 2천년을 뛰어 넘은 셈이자 엄청난 진보였다. 각설하고 누구든 로마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영화 <로마의 휴일>과 오드리 햅번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 번쯤은 <로마의 휴일> 코스를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그게 누구든 옆에 있는 동행을 오드리 헵번이다, 그레고리 팩이다 생각하면서 말이다.

로마에 도착해서 짐을 풀자마자 가 본 곳은 트레비 분수였다. 오드리 헵번이 그레고리 팩과 함께 스쿠터를 타고 가서 동전을 던졌던 트레비 분수. 영화 속에서는 아이들이 여름의 태양을 피해 분수에 뛰어들어 물장난을 진탕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처럼 관광객에 둘러싸인 분수와는 사뭇 다른 낭만적인 모습. 현실보다 영화가, 현재보다 과거가 더 그리워지는 장면이다. 등지고 동전을 분수에 던지면 로마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지금은 동전을 던지기엔 사람이 너무 많다. 던지다 자칫 남의 뒤통수에 동전이 꽂히는 불상사를 피하려면 사방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분수 가까이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이라 재빨리 사진 몇 장 찍고, 동전 두 개를 분수에 빠뜨린 채 빠져나온다.

트레비 분수에서 나와 근처 젤라토 가게에서 젤라토 하나를 사 입에 물었다면 당연히 갈 곳은 정해진 셈이다. 오드리 헵번의 발길을 쫓아 스페인 계단으로 직진한다. 침몰하는 배를 떠올리게 하는 바르카치아 분수를 앞에 두고 시작된 스페인 계단의 위쪽 끝에는 오벨리스크와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유니폼을 입은 관리자들이 계단에 앉아 오드리 헵번처럼 아이스크림 한입 베어 물고, 인싸가 되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을 일으켜 세우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얼마 전부터 이곳 스페인 계단에서는 앉아서 뭘 먹거나 사진을 찍는 일이 금지됐다. 야박해 보이지만, 다 닮아져 버린 계단들을 보면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스페인 계단에서 꼭 봐야 할 게 있다면 성당 입구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에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저녁노을에 물들어 가는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는 일이다. 그냥 예쁘다. 잠시 오드리 헵번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여기 세워진 오벨리스크가 이집트에서 떼다 붙인 게 아니라 로마에서 직접 만들어 세운 거라니 옆에 서서 노을 보는 맛이 개운하다.

이튿날 로마의 휴일 투어는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됐다. 포로 로마노는 수면제에 취해 해롱거리며 벤치에 누워 있는 오드리 헵번을 그레고리 팩이 처음 만난 곳이다. 신전과 공회당 같은 흔적이 몰려 있는 이곳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의 가로수길 정도 되는 곳으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옆에는 귀족들의 고급주택 단지이기도 했던 팔라티노 언덕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다음 코스는 성천사의 다리. 오드리 헵번을 보고 뻑 간 이탈리아 이발사가 초대한 선상 파티에서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이 함께 춤을 추며 본격 애정행각에 들어갔던 곳이다. 이탈리아 이발사는 의문의 1패를 당하고 만 셈이다. 낮에 가면 갈매기 똥에 젖은 다리의 조각상들이 더 도드라져 운치라고는 일도 없지만, 은근한 불빛 아래에서 바라본다면 제법 영화스러운 맛이 날 것 같은 곳이다.

오드리 헵번 코스의 마지막은 누가 뭐래도 ‘진실의 입’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의 입에 손 한번 넣고 호들갑 한번 떨어 보지 않고 로마에서 제대로 휴일을 즐겼다고 말하기는 꿀려도 한참 꿀리는 일이다. 아침 일찍 찾아간 진실의 입은 아직은 한가했다. 그곳을 지키던 풍체 좋은 이탈리아 관리인이 나서서 기념사진까지 찍어 주신다. 우리가 잡은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이래저래 사진사의 요구가 많다. 물론 손이 잘리거나 할 일은 없다. 워낙 거짓 없이 사는 인생이라 그럴 지도라고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겠지만.

영화 <로마의 휴일>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챙겨 볼 수 있었다. 여행을 가기 전에 봤으면 좋았겠지만, 정신없이 마감치고 짐 챙겨 떠나느라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하지만 돌아와 본다고 해서 감흥이 떨어질 일은 없다. 전이든, 후든 로마 여행을 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은 보면서 여행의 맛을 돋구거나, 여행의 추억을 마무리하는 일로 이만한 메뉴는 찾기 힘들 것 같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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