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이탈리아는 여름휴가철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관광객이 넘치는 곳이다. 밀라노와 베네치아·피렌체의 1월은 겨울이 뭐냐, 비수기라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본다는 듯했다.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좁은 골목길에서는 줄을 지어 어깨를 부딪쳐 가며 지나가야 하는 곳이 더 많았다. 식당은 어디를 가나 밥때가 되면 사람들로 금세 테이블이 가득 차 버렸다.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사람 반, 유적 반의 위엄을 뽐내는 곳이 이탈리아의 유명 관광지·관광도시들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길거리에서 담배를 많이 피워 대는지 이곳 공기는 니코틴 반, 공기 반이라고 느끼게 할 정도로 쿰쿰했다. 아무리 눈이 호강하는 곳이라 해도 이런 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나니 피로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만큼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가 또 어디 있겠나. 사람들의 에너지로 활력 넘치는 곳이라 좋아했던 일이 며칠 지나니 이젠 좀 벗어났으면 하는 일이 된다. 간사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내 마음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부터 이 즈음에 쉼표 하나를 넣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찍은 쉼표가 바로 이곳 아시시였다. 여행자가 쉬어 가기에 아시시만 한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곳은 조용하고, 편안하고, 다정하다.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밀려들어 온 상큼한 공기 한숨과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함께 들이마신다. 낮게 깔린 안개 사이를 파고드는 아침 햇살 속으로 듬성듬성 자리 잡은 시골집들이 정겹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마실을 나가 본다. 돌바닥의 찬기가 가시지 않은 골목길이 아직은 한산하다. 우리처럼 마실을 나온 듯한 길고양이 한 마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경계도 없이 스윽 지나간다. 냐옹거리며 집사처럼 불러 보지만 눈길 한번 안 주는 도도한 녀석이다. 햇볕이 잘 드는 어느 집 이층 창문에 두 다리를 걸치고 고개를 내민 하얀 덩어리와 눈이 마주친다. 흰 덩어리에 까만 단추를 박은 인형 같은 강아지는 오가는 사람 구경하는 게 일상의 낙인 것처럼 보였다. 창문 안 쪽에서는 집주인 아줌마가 이불을 털고 방을 쓰느라 바쁘다. 문득 강아지 사진을 찍느라 호들갑을 떨고 있는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밝은 미소로 아침 인사를 건넨다. 그냥 마음이 좋아진다. 얼마쯤 더 걸어가다 보니 길 건너편에서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채소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던 여자가 이쪽을 향해 손 인사를 한다. 자세히 보니 어제 저녁을 먹었던 카페 ‘모나리자’의 주인장이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마실 나왔다며 이쪽을 보고 소리치는데 골목 전체가 울린다. 식당에서 밥 한 번 먹은 것 뿐인데도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유쾌한 에너지를 전해 주는 이가 있으니 내가 마치 여행자가 아니라 동네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숙소에서 오르막을 조금 걸어가면 작은 슈퍼 하나가 나온다.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알찬 가게다. 3일 동안 지내면서 매일 한 번씩은 들른 이 슈퍼의 주인아저씨도 잊을 수가 없다. 점심 때 근처 식당에서 먹었던 이 동네 와인 ‘아시시 로소’ 두 병을 사서 한 병 따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걱정 마라는 손짓과 함께 뒤에서 기다리는 동네 손님 계산부터 먼저 하고 처리해 주겠다고 웃으며 말씀하신다. 동네 손님을 보내고 주머니에서 오래된 와인 따개 하나를 꺼내더니 슥슥 코르크를 밀어 올려 능숙하게 마개를 따낸다. 그리고는 다시 코르크를 절반쯤 밀어 넣고 종이봉투에 감싸서 건네준다. 구겨진 종이봉투 입구 밖으로 슬쩍 머리를 내민 코르크. 봉투를 받아들고 옆구리에 끼었더니, 오~ 이거 영화에서 자주 봤던 술주정뱅이들이 들고 다니면서 먹던 바로 그 자세가 나온다. 바로 따서 한잔 들이키면서 겉멋 부려 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담는다. 낭만과 진상은 한 끗 차이니까.

5시밖에 안 됐는데, 날은 벌써 어둑하고, 동네는 잘 준비를 다 마친 것처럼 조용하다. 돌아가는 길에 사려고 봐 뒀던 피자가게도 벌써 간판을 거둬들였다. 저녁거리가 사라졌다. 손에 든 건 달랑 와인 2개뿐. 여행길에 굶는 것만큼 서글픈 게 없는지라, 동네를 한참 헤매며 문을 연 가게를 찾는다. 다행히 파니니와 파네파스타를 파는 작은 분식집이 열려 있다. 음식을 주문하고서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린다. 그런데 이 가게 총각은 앞서 온 손님들과 수다를 떠느라 우리 주문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총각 뒷담화를 까려다가 멈칫.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파스타를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파니니를 오븐에 다시 굽고 있었다. 그리고는 먹기 좋게 칼로 잘라 단단하게 포장을 하고는 우리를 부른다. 뜨거우니까 조심하라는 살가운 말과 함께 포크 세 개까지 챙겨 주는 세심함이란. 받아든 음식이 왠지 인스턴트하지 않고 집밥처럼 느껴졌다. 돌이켜 보니 아시시는 성자들의 마을이 아니라 성자들 같은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들를 수 있다면 이 사람들과 조금은 더 친한 척하며 수다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상상을 하니 배보다 마음이 앞서 불러 온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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