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20여년간 사회단체 활동을 해 오며 요즘처럼 자괴감이 든 적이 없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부터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둘러싼 논란까지, 소위 진보개혁으로 분류되는 시민단체 행보가 한심하기 그지없어서다. 도대체 문제가 무엇일까. 한 번은 우연이라지만, 두 번은 인과관계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먼저 윤 의원 논란 배경이기도 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자. 문재인 정부는 2015년 한·일 정부 간 합의 과정에 피해자를 참여시키지 않았고, 합의문에도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가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모순적이다. 정부가 말하는 ‘진정한 사과’는 옛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세운 원칙으로 법적 배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기집권 중인 일본 자민당 태도를 보면 당장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쉽지 않다. 반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고령이다. 둘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칙만 밝히며 허송세월하고 있는 정부의 속내는 무엇인가. 피해자 참여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고, 진정한 사과는 불가능하니까, 결국 위안부 문제를 여당의 지지기반인 반일 민족주의로 묶어 두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아닐까. 이런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 준 것이 바로 윤 의원의 국회 입성이었다. 그는 “21대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여당의 선거 프레임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 정대협의 원칙과 총선 프레임을 합하면 무엇이 되는가. 진정한 사과를 승전국 입장에서 받아 내겠다는 것이 된다. 황당하다. 그래서 이 상황의 결론도 뻔하다. 몇 년 지나고 나면 윤 전 대표의 국회의원 자격과 정대협 후신인 정의기억연대의 이런저런 기득권만 남게 될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와 반일 민족주의라는 자기 모순적 세계관 탓이 크다.

현대사회의 정의는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도록 규칙을 세우고, 개인이 받은 피해로 인한 ‘분노와 처벌’이 사회를 파괴하는 지경까지 커지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피해자는 보호받고 치유돼야 하지만, 그렇다고 피해자가 가해자를 직접 응징하거나 피해자가 원하는 만큼의 처벌이나 배상을 무조건 강제해서도 안 된다. 인격적 관계의 분노와 처벌을 지양한 것이 바로 현대사회의 중요한 진보였다. 이렇게 보면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 보호를 우선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인격적 관계로 처벌 방법과 수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는 현대사회 정의에 미달한다. 이는 국가 간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국제법이 국가의 법만큼 발전되지 않아서 여러 곤란함이 있을 뿐이다. 그 부분을 당사자 국가가 채워 나가는 것이 현대 외교관계다.

윤 의원을 포함해 정대협은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워 피해자가 만족하는 방법으로 일본을 처벌하겠다는 위안부 운동을 만들었다. 또한 국가 간 관계에서 양국이 채워야 할 국제법의 빈 부분을 반일 민족주의로 뭉개 버렸다. 정대협은 현대의 정의를 기억하지 못한 채, 시민사회 연대를 정부로까지 확대했다가 곤란에 처했다. 그리고 단체의 회계 관련 문제제기를 피해자를 공격한다는 둥, 일본이 좋아할 일이라는 둥, 똑같은 논리로 방어하려다가 더 깊은 수렁에 빠졌다.

한편 정치개혁과 검찰개혁을 한다며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으로 달려간 시민단체 전문가들도 문제였다. 단체로는 참여연대와 민변, 인물로는 조국 전 장관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서도 문제는 이들의 개혁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두 개혁의 목표는 법치 확립에 있다. 정의를 법으로 확립하고,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올바른 법치다. 누군가에게만 더 정의롭고, 누군가에게만 더 평등한 법은 개혁돼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면, 시민단체 전문가들이 한 일이란 자신들에게만 더 정의롭고 평등한 법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덜 정의롭고 덜 평등한 법치의 희생자였다고 반복해서 항변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공수처법)을 만들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수처장이 검사와 법관을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그들의 편에 서지 않는 검사와 법관은 이제 범죄수사의 대상이 된다. 청와대에 있었던 최강욱 열린민주당 의원은 윤석열 검찰총장을 공수처 1호로 수사해야 한다고 외쳤고, 법관이었던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자신을 비판하는 법관들을 탄핵하겠다고 외쳤다. 그런데 이런 것이 왜 시민에게 더 정의롭고 평등한 법치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확실하게 더 정의롭고 평등한 것은 맞지만 말이다. 박근혜 탄핵 사태를 거치며 확인된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개혁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검찰개혁의 요란한 구호 속에서 대통령제 개혁은 오히려 후퇴했다.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으로 간 수많은 시민단체 전문가들은 법치가 아니라 대통령과 자신의 진영에게만 더 정의롭고 평등한 법을 만들었다.

정리해 보자. 조국 전 장관부터 윤미향 의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논란은 자유주의에도 미달하는 그들의 세계관이 원인이었다. 자유·정의·법치 같은 자유주의 기본개념이 그들에게는 진영을 강화하기 위한 수식어로만 사용됐을 뿐이었다. 그들을 지지한 시민단체도 당연히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진영이 곧 정의요, 법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눈먼 사람이면서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길잡이들이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오늘날의 눈먼 길잡이가 바로 정부와 함께 하는 시민단체 전문가들이라 하겠다. 시민은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필자는 변혁을 위해 사회운동을 해 왔다. 하지만 현재 변혁은 무망한 노릇이다. 변혁이란 자유주의가 이룬 것보다 더 많은 자유와 평등을 이뤄 보려는 도전이다. 자유와 평등의 지향이 멈춰 선 시장을 지양하고, 법치 이상의 정의를 시민의 자주적 연합으로 구현해 보려는 이상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사회는 자유주의는 고사하고, ‘내로남불’을 깃발로 삼은 눈먼 길잡이들의 세상이 된 것 같다. 당장 필요한 것은 이들부터 비판하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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