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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라 살포가 ‘표현의 자유’라는 착각
▲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극우 탈북자단체들이 대형 풍선에 띄워 날린 삐라에 “대남 사업을 총괄하는” 김여정이 남북 합의 위반이라며 날카롭게 반응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정부는 “단호한 대응”을 강조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표현의 자유’ 논란을 의식한 듯한데, 올바르지 못한 태도다.

표현의 자유란 기득권 세력이 억압하거나 금지해 온 문제를 국가권력의 감시와 억압을 뚫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과 관련돼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에서 보장해야 할 표현의 자유는 북한 정권을 혐오하고 그 지도자를 비방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의 내용이어야 한다. 북한을 비난하는 자유는 1945년 분단 이후 지금까지 남한에서 별다른 제한 없이 보장돼 왔다. 역사적으로 독재정권들이 체계적으로 보장해 온 표현의 자유는 북한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조장하고, 동족상잔으로 이어질 전쟁을 거리낌없이 선동해 왔다.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표현의 자유는 증오와 혐오가 아니라 이해와 포용을 증진하는 것이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욕지거리를 마음대로 내뱉는 것과 다르며,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싫다는 데 계속 지껄이는 것과도 다르다. 특히 자신과 다른 생물학적 성·인종, 국적·사회적 지위, 성적 취향, 종교·신념·사상·체제에 대한 의견 표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표현의 자유는 여성을 비하하고, 인종을 차별하며, 개발도상국을 폄하하며, 경제적 약자를 무시하고, 동성애자를 혐오하고, 이슬람교를 배제하고, 반자본주의 사상을 탄압하고, 북한 체제의 존립을 부정하는 세력에 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반대가 돼서는 안 된다.

특히 남북 정상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라는 큰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화해·협력·교류를 합의했다. 그 일방인 북한에 대해서는 화해와 협력과 교류 분위기를 해치는 방향으로 표현의 자유가 왜곡되거나 악용되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과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작년 가을, 서울 홍대 근처 카페에서 북한 인공기와 김일성·김정일 초상화를 내걸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위협을 받고 철거된 적이 있다. 한국이 진짜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라면 광화문 사거리나 미국 대사관 앞도 아니고, 자유분방한 젊은이들이 들락거리는 대학가 술집에 내걸린 인공기에 시비를 거는 옹졸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술집에 인공기와 김일성 초상화를 내거는 행위와 대한민국의 국가안보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반대로 북한 체제를 혐오하고 북한 지도자를 비난하는 내용의 삐라를 북한 영토 안으로 날리는 행위는 대한민국의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반국가적 행위로 제한돼야 한다. 우선 2018년 체결된 남북 국가 간 합의사항 위반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도발함으로써 대한민국 군인과 휴전선 인근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테러’ 행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역지사지해 생각해 보자. 휴전선 인근에서 북한 주민들이 북한 당국의 묵인하에 대형 풍선에 내용을 확인할 수 없는 물건들을 잔뜩 담아 남한으로 무차별적으로 날려 보낸다면 한국군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반미주의자들이 경기도 평택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산재한 미군 기지 담장 너머로 미군 철수와 트럼프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내용의 삐라를 담은 대형 풍선을 무차별적으로 날려 보낸다면, 이를 미국 정부나 한국 정부는 표현의 자유라며 허용하겠는가. 주한미군 기지들이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력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가 적용되지 않는 외국 영토라면, 휴전선 너머 북한은 더욱 그러하다.

민주주의의 전제는 안보(security)를 해치는 표현의 남용을 제한하는 데 있다. 국가폭력에 시달려 온 대한민국에서 안보라면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만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안보는 국가안보에 더해 사회안보(social security, 사회보장 혹은 사회복지라고도 한다)와 인간안보(human security)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국가안보가 중요한 이유도, 인류문명의 경험을 돌아볼 때 국가안보 없는 사회안보와 인간안보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보는 안전(safety)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프랑스 혁명이 제시한 ‘자유와 평등과 박애’라는 민주주의 원리에서 박애가 ‘안보’ 개념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된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민주적 가치는 결국 인간안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파편화된 개별 인간을 넘어 그 개인들이 관계를 맺는 공동체인 가족과 사회와 국가를 포괄한다.

물론 국가안보가 공권력, 즉 국가권력의 강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말로 국가안보로 오역되는 national security의 뜻을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사실 national은 국가가 아니라 국민으로 해석돼야 한다. 관료나 경찰 같은 통치 기제를 일컫는 국가는 영어로 state다. 미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의 원인은 국가(state)가 백인과 부자에게 보장하는 인간안보(생명의 안전)와 사회안보를 흑인과 빈민에게 평등하게 보장하지 않는 데 있다. 미국에서 흑인과 빈민은 국민안보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안보·사회안보·국민안보에 실패한 국가에 대항해 민중들이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반대로 탈북자단체들의 무분별한 삐라 살포는 우리 국민들의 인간안보·사회안보·국민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를 증진하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역으로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표현의 남용’에 다름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적 질서를 위태롭게 만드는 불법행위로 공권력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윤효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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