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경진 공인노무사(노동인권실현을 위한 노무사모임 회원)

한낮에 마을 놀이터에 반려견을 산책시키러 나갔다가 입구 주변에 오토바이가 일렬로 세워져 있는 것을 봤다. 몇몇 배달통 위에는 배달대행 서비스 회사명과 지점명이 쓰여 있었다. 한강 너머 지점인데 여기까지 오셨구나 싶어서 공원 안쪽을 둘러봤다. 헬멧을 벗고 잠깐 휴식을 취하는 라이더가 몇 분 계셨다. 쉴 곳조차 마땅치 않구나.

문득 중학교에 다닐 때까지 보험설계사로 일하셨던 어머니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울 신설동의 보험회사에 출근해 아침 조회를 마친 후 양손 가득 선물꾸러미를 든 채 영업과 고객관리를 위해 외근을 하던 어머니에게는 휴일이 없었다. 주말과 공휴일조차 해약을 막기 위해 고객에게 찾아가 보험료 납부를 권유하셨다. 그래도 고객이 납부하지 않는 경우에는 실적을 유지하기 위해 어머니의 돈으로 미납 보험료를 채워 놓곤 하셨다.

지인들의 소개를 통해 납입료가 매우 낮은 상품 하나라도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일했다. 성탄절에도 단 둘이서 집을 지키고 있었던 나와 동생에게 “엄마 이번에 우수사원 표창 받았어. 축하해 줘” 하면서 커다란 곰 인형을 선물로 가져오곤 하셨다. 싸늘하게 “엄마, 나는 더 이상 국민학생이 아니야. 이런 선물 같은 건 필요 없어요”라는 말을 내뱉고 방으로 발걸음 한 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20년을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어머니가 딸들을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하는 건 그때의 시간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면서 노동자라고 불리지 못하고 노동조건의 최저기준에 관한 법률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학습지 교사와 보험모집인, 골프장 경기보조원들은 근무일마다 출근 조회를 하고 있다. 자동차 대리점 영업사원들의 업무는 사실상 지점을 소유하고 있는 자의 관리·감독 아래 놓여 있다. 고객의 클레임(민원)이 발생했을 때 이 책임은 누구에게 귀속될까.

회사뿐만 아니라 명목상 개인사업자인 특수고용 노동자들에 대한 제재로 이어진다. 이게 업무수행에 대한 사용자의 상당한 지휘·감독이 아니라면 뭘까. 업무장소와 근무형태, 보수의 지급·분배방식은 누구의 의사에 따라 결정된 거란 말인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순차적으로 일부 직종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에게 노동 3권이 보장돼 왔다. 고용보험과 산업재해보상보험 적용범위에 포함돼 왔지만 이것만으로는 갈 길이 한참 멀었다. 근래에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근로자’ 개념의 개정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노동 3권 보장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스스로의 의지나 의사와 무관하게 수십년 동안 실질적으로는 노동자임에도 노동자라고 불리지 못하는 굴레를 해소해야 한다. 업무수행 방식과 고용형태가 다변화하는 추세 속에서 시대의 흐름에 부합하도록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왔던 특수고용직의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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