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이탈리아 여행자들에게 피렌체는 절대 빼먹어서는 안 되는 도시 중 하나다.

로마와 베네치아가 당연한 만큼 이탈리아 여행 일정에 피렌체를 넣는 것도 당연하다. 손꼽히는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다. 중세의 어둠 속에서 질척대던 유럽문명에 한줄기 부활의 빛을 가져온 르네상스 발생지라는 도시의 이력 때문이다.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갈릴레오 갈릴레이, 메디치 가문처럼 피렌체와 연결된 이름들 몇 개만 들먹여도 이 도시는 우쭐거릴 만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조각가 로뎅이 되는 것도 없고 무슨 짓을 해도 좀처럼 뜨지 못해 절망하던 젊은 시절, 이곳 피렌체에서 만난 미켈란젤로의 ‘노예’ 시리즈에서 엄청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는 걸 봐서 근대 유럽 예술가들에게도 이곳은 제법 먹어 주는 도시였던 모양이다.

로뎅의 최고의 작품인 ‘지옥문’(생각하는 사람도 이 지옥문 꼭대기를 장식하던 부속 조각 중 하나였다)이 이곳 피렌체의 성 조반니 세례당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천국의 문’과 대구를 이루고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다. 예술에 나름 눈높이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우피치 미술관이나 아카데미아 미술관이 피렌체에 오는 이유가 되겠지만, 나처럼 ‘예알못’이자 인생사진 하나 기웃거리다 건지는 게 더 중요한 객들에게는 누가 뭐래도 피렌체의 랜드마크인 두오모 대성당의 돔에 오르는 일을 더 앞세우게 된다. 두오모 돔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30분 단위로 입장객을 받는데 늘 오르려는 사람이 넘치는지라 현장에서 표를 사서 들어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새해 첫 주말이 끼어 있어서 그 예약조차 쉽지 않았다. 동방박사의 날 축제까지 겹쳐지면서 온라인 예매는 순식간에 동이 나 버렸다. 결국 피렌체에 도착하는 날 오후 4시30분 표를 겨우 구했다. 오후 5시가 마지막 입장이었으니까 그날의 끝물에 오른 셈이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 시간에 오른 것이 행운이었지만.

밀라노에서 출발해 피렌체 산타마리아 노벨라역에 도착한 것이 2시쯤.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해 짐까지 잘 풀고, 주인장이 놓아둔 열쇠까지 꼼꼼히 챙겨서 일단 점심부터 해결하자며 문을 나섰다. 그리고 문을 잠그려고 열쇠를 돌리는 순간, 사달이 났다. 멀쩡해 보이던 열쇠가 ‘똑’ 소리를 내더니 두 동강이 난 것. 1분30초 정도 당황해서 부러진 열쇠만 바라보다 급히 주인장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되도록 불쌍해 보이도록 구구절절하게. “두오모 돔 올라가려고 피렌체에 왔는데, 열쇠가 부러져서 오도가도 못한다. 입장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어쩌면 좋냐? 좀 도와주시라.” 뭐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메시지의 구구절절함이 통했는지 주인장은 빛의 속도로 달려와 줬다. 헬맷을 뱅뱅 돌려 보이며 오토바이를 타고 날아왔다며 말하더니 열쇠 하나를 건네고는 쿨하게 퇴장한다. 덕분에 배도 채우고, 피렌체 젤라토까지 디저트로 먹을 여유까지 챙긴 뒤 돔에 오를 수 있었다. 돔은 그리 높지는 않다. 허벅지 근육이 채 팍팍해지기도 전에 전망대에 오를 수 있을 정도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밖에 안 되는 회전식 계단이 주는 밀폐감이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보다 공포스러울 수도 있으니 주의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전망대에 올라 마주친 첫 풍경에 속절없이 탄성을 내뱉고 만다. 도시는 낮게 깔린 저녁 강 안갯속에 반쯤 잠긴 채 촉촉하게 젖은 모습으로 석양의 햇빛을 토해 내기 시작한다. 멀리서 시작되는 석양은 탈 듯이 붉은데 도시의 물안개에 희석된 노을빛은 부드러운 핑크와 회색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물안개 위로 쑤욱 솟아오른 몇몇 성당의 첨탑과 종탑들이 서로 저녁 인사라도 나누는 듯한 모습이다.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따라 붉은 태양이 힘껏 마지막 빛을 토해 내려는 강렬한 노을이 아니라 공기 중의 수증기에 살짝 얹혀서 슬며시 도시 위로 내려앉는 잔잔한 노을이라니. 이처럼 묘하게 젖어 드는 일몰을 전에 본 적이 있었을까. 기껏 한 번 뿐일 개인적인 경험으로 누군가에게 ‘이건 꼭!’이란 말을 쓰기 좋아하지 않지만, 피렌체의 젖은 노을 앞에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피렌체에 왔다면 두오모 성당의 코폴라는 꼭 올라와 봐야 한다. 해가 지는 시각에 맞춰서라는 조건이 붙은 채로 말이다.

피렌체에는 일몰 핫스팟이 하나 더 있다. 두오모 코폴라에서의 일몰이 도시의 한가운데서 바라보는 것이라면 강 건너편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도시 밖에서 피렌체를 한눈에 담기 좋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의 계단에 촘촘히 앉아 한껏 긁어 주는 버스킹 가수의 노랫소리에 취해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게 색다르다. 입장료가 없는 것은 덤이다. 두오모 코폴라의 노을만큼 극적이지는 않지만, 훨씬 더 넓은 시야로 노을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눈은 더 시원하고 편안하다. 근처 노점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 뽑아 들고 노래 몇 곡 들으며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게을러지는 것 이외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좋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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