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보건기구(WHO)에 분담금을 안 낼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 정부가 반미 성향을 이유로 유엔 산하 국제기구를 탈퇴한 사례는 자주 목격된다. 1970년대 미국은 국제노동기구(ILO)가 “친소련”이라는 이유로 탈퇴했다. 정치적으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ILO는 미국을 재가입시키기 위해 노동자 권리에 집중하던 활동 기조를 고용 문제로 전환하는 타협책을 내밀어야 했다.

이는 세계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노동 문제가 고용 문제, 즉 일자리로 대체됐고 노동자운동은 종업원운동으로 축소됐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인식도 이런 사태 전개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1980년대 초 미국은 ILO에 복귀하는데, 국내적으로는 미국 법률과 충돌하는 ILO 협약을 비준하지 않는다는 술수를 부렸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에는 미국노총(AFL-CIO)도 함께했다. 이런 연유로 미국 노동운동이 ILO 협약 비준 투쟁을 한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현재 190개 ILO 협약 중에 미국이 비준한 건 14개에 불과하다. 8개 기본협약 중에서는 2개만 비준했다.

ILO만 미국과 삐걱거린 게 아니다. 제3세계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던 유엔 산하 국제기구는 대부분 미국의 공격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유엔 산하 교육문화과학기구인 유네스코(UNESCO)다. 1년 전엔 미국과 이스라엘이 유네스코를 동반 탈퇴했다. 미국은 유네스코가 “반이스라엘” 성향이라며 분개했다.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이 탈퇴 의향서를 보내자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수상도 탈퇴 의향서를 보냈다. 유네스코가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점령을 비난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네스코 회원국 정회원 자격을 준 게 반이스라엘의 증거로 제시됐다. 미국은 유네스코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복귀하지 않을 것이라 협박하고 있다. 미국이 유네스코에 내지 않아 밀린 분담금 6억달러는 공중에 떠 버렸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동맹이 빛을 발한 결과 유엔 기구인 유네스코는 곤란에 빠졌다.

미국은 WHO에 대한 분담금을 보류하고 여차하면 탈퇴하려는 이유로 WHO의 “친중국” 성향을 들고 있다. 친중국을 미국 입장에서 말하면 반미다. 1970년대 ILO의 친소련 성향 역시 미국 입장에선 반미다. 유네스코의 반이스라엘 성향 역시 미국 입장에선 반미다. WHO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판도가 미국의 꼴불견 행동으로 어지럽게 돌아가자 55개 아프리카 국가들로 구성된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은 의장인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명의로 “전례 없는 글로벌 의료 위기에 초기부터 대응해 온 WHO 사무총장의 예외적 지도력에 대한 평가를 재확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프리카연합은 “WHO가 보여준 좋은 성과를 인정·평가하며 전염병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조치에 만족감을 표한다”며 “WHO와 사무총장에게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내며 (중략) 국제 사회도 손을 잡고 사무총장을 비롯한 전체 WHO 직원들의 노력을 도와 세계적 전염병에 맞서는 글로벌 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다.

친미·친서방 성향의 국내 언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선동에 현혹돼 에티오피아 출신인 WHO 사무총장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를 두고 중국의 꼭두각시로 몰아붙이고 있다. 반중국 정서에 편승해 WHO를 비난하는 경향은 진보 성향의 언론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시사인’ 3월31일자의 “해도 해도 너무한 중국의 허수아비?”가 대표적이다. 기사는 “중국의 거듭된 유엔 기구 장악의 일환”이라는 시각으로 WHO 사무총장 문제를 바라본다. “노골적인 친중국 행보”의 사례로 “취임 첫 일성으로 타이완을 WHO 행사에서 제외하는 ‘하나의 중국’ 발언을 한다”는 것과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를 친중 인사라는 이유로 WHO 친선대사로 임명했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운다.

‘하나의 중국’ 정책으로 타이완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1971년 10월25일 이래 유엔의 원칙이다. 이날 통과된 유엔총회결의 2758호에는 대만이 아닌 중국을 유엔의 유일한 합법 대표로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ILO 사이트에서 대만을 검색해 보면 중국의 성(a province of China)라는 설명이 나온다. 협약 비준 현황을 나라별로 살펴볼 수 있는 ILO 사이트에는 대만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만이 아니라 아프리카연합(AU) 전체가 친중국 행보를 해 왔다. 무가베가 WHO의 친선대사로 임명된 것은 그가 친중 인사여서가 아니다. 그의 통치하에서 짐바브웨 정부가 WHO의 도움을 받아 전 국민 의료제도 도입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유엔 산하 국제기구들 가운데 미국과 중국을 두 축으로 하는 국제정치의 영향력 밖에 존재하는 기관은 없다. 친미와 친중, 혹은 반미와 반중의 자장을 벗어난 무중력 혹은 무균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ILO의 수장 자리를 미국과 서방쪽에서 장악하는 건 당연시하면서 WHO 수장을 중국과 반미 성향의 제3세계쪽에서 장악하는 것을 불온하게 보는 태도는 과학적이지 않다.

코로나19 사태는 미국과 유럽 문명의 약점과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다가올 미래는 미국과 유럽이 추락하고 중국과 아시아가 발흥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한국의 미래 역시 미국과 유럽이 아니라 중국과 아시아에 달려 있음은 분명하다. 국제정세를 바라볼 때 미국과 유럽 중심의 편향된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과 아시아 중심의 시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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