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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경총
▲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벌써 20년도 더 된 오랜 이야기가 돼 버렸다.

1997년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많은 국민이 이를 국가적 재난으로 인식하고 금 모으기 운동에 나섰다. 당시 나는 한 사업장 노조위원장이었고, 노조 주도로 회사에 제안해 직원 금 모으기 운동을 했다. 금 모으기 운동을 한다고 해서 외환위기가 해결되리라는 생각을 한 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비상한 시기에 온 국민이 하나로 힘을 모은다는 인식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노동에 대한 정부와 재계의 인식은 참으로 각박했다. 정리해고가 도입되고 파견노동이 합법화됐다. 비정규 노동은 보편적인 고용형태가 되고, 노동 내부의 격차도 극심해져 더 이상 노동자를 하나의 계급으로 볼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다가 이 사회 자체가 지속가능하겠냐는 불안이 전 사회에 퍼질 만큼 사회적 기반이 약화됐다.

정부와 재계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에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채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한국경총이 지난 23일 ‘경제 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를 국회에 제출했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는 마음과 함께 ‘그래 역시 이 나라 자본은 참 변하지 않는구나’ 하는 씁쓸함을 없앨 수 없다. 인간의 면역체계를 교란하는 세균과 바이러스가 등장하면 연구를 통해 백신이라도 생산하지만, 사회체계를 교란하는 위험에는 항체 형성도 백신 생산도 없는 듯하다.

위기대응의 주요한 측면은 방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위험에 얼마나 기민하고 치밀하게 대응하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평가돼야 한다. 모든 나라의 정부들이 열 일 제치고 나서서 사회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분주하다. 우리나라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아귀다툼하고 있는 정치권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각국 정부 대책을 노동에 한정해서 살펴보자면 고용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해고를 막기 위해 정부가 유동성을 지원하는 정책들을 펴고 있다. 정리해고를 회피하는 기업들에 임금 비용을 보상한다든지, 조업시간을 단축하는 기업들에 대한 지원금을 늘리거나 지원 요건을 완화하고 있다. 휴업으로 인한 임금손실을 보전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한시적으로 해고 금지조치까지 취했다.

현재 우리가 맞서고 있는 위기는 그 대응책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강력한 조치는 경제적 침체를 통한 사회적 위기를 가속화한다. 그렇다고 방역이 허술하면 그 또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기 때문이다.

긴급자금을 투입하기 위한 재정 확장정책은 장기적으로는 화폐가치를 떨어트려 임금소득자들에게 피해가 올 것이다. 그렇다고 재정 확장정책을 펴지 않으면 당장 목숨을 이어 가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부채 증가는 국민 세금으로 갚아 나갈 수밖에 없지만, 이를 회피할 수도 없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조치 외에는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나라 국민은 위기를 맞아 참으로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불편함을 감수하며,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간 이 위기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 때문에 생겨나는 불안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국민이 그 불안을 견뎌 내고 있다면, 이 나라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방역대책을 넘어 사회공동체를 위한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적 위기는 생산과잉 때문이 아니라 수요부족 때문이다. 그래서 수요를 뒷받침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중에서 고용유지 정책은 가장 앞 순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경총에서 내놓은 경영계 건의라는 것이 고작 해고를 자유롭게 하고, 대기업 세금 깎아 주고, 노동자 임금을 줄여 달라는 것이다. 공동체 전체의 위기 앞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다하려는 의지는 찾을 수 없다.

안정적인 고용유지는 기업의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책임이다. 원초적인 책임이고 윤리적인 책임이다. 그 책임을 다 하는 데 있어 어려운 상황이 있다면 이를 호소하고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 전체의 위기 앞에서 무한 악순환을 반복할 요구를 내놓으니 비열하기 짝이 없다. 정부가 돈을 부어서라도 고용을 유지하려는 판국에 경총은 어느 별나라 사람들인지 의문스럽다.

코로나19의 공격을 받고 난 후의 세상은 이전 세상과 좀 달라졌으면 한다. 위기 앞에서 전 세계의 구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주어진 과제는 부서진 담장을 고치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취약한 노동구조뿐만 아니라 경제·사회구조 전체를 재조명하고 위기에 강한 구조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나라 지도자들이 이전 경제위기 때 반복했던 일을 재탕하지 않기를 바란다.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김형탁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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