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지난 13일 ‘코로나19 대응 대통령과 경제계 간담회’에서 제시된 재계의 16개 모든 건의사항을 수용할 것이라고 19일 밝히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내수 진작을 위해 회식이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근로제에 저촉되는지 우려를 해소해 달라”는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건의에 대해 청와대는 “자율적 회식은 주 52시간과 무관하다”는 것을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위한 조속한 입법,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학물질등록평가법)과 화학물질관리법의 유연한 적용도 수용하기로 했다. 어디선가 본 모습니다. 지난해 일본 수출보복이 발생하자 정부는 재계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부 소재 연구·개발 업무에 대해 특별연장근로를 인가했다. 정부가 인가연장근로 사유를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도 재계는 환경규제 개선을 요구했고 일부는 시행됐다. 국가위기 사태에 항상 희생과 양보만 해야하는 노동계의 얘기를 들어 봤다.


 

▲ 이은호 한국노총 대변인

재벌의 경제위기 청구서는 노동자에겐 위기의 고착화
이은호 한국노총 대변인

“지금이 나라를 확 바꿀 절호의 기회란 말야”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대사다. 1997년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경제가 어려울 때 위정자와 사용자는 ‘위기는 기회다’를 외치며 ‘경제위기 청구서’를 내놓는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가는 기회는 노동자에게 ‘위기의 고착화’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사용자들이 내놓은 건의에 대해 정부가 전폭적으로 수용한다고 밝혔다. 코로나19에 대한 국민 불안이 높고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이 큰 것은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과할 정도의 선제조치’는 방역에 필요할 뿐이며 기업의 요구에 대한 ‘과도한 수용’은 자칫 미래의 재앙이 될 수 있다.

기업들은 당장 노동시간단축에 대해 딴지를 걸고 화학물질등록평가법과 화학물질관리법 등 환경 법령의 유연한 적용을 요구하고 있다(이 와중에 회식시간이 주 52시간 상한제에 포함되는지 여부로 말이 오가는 모습은 코미디였다).

더욱 아쉬운 점은 정부의 대책이 노동자와 자영업자 등 온몸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국민을 피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부는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코로나19 대응 항공·해운 등 긴급 지원대책’을 발표했으나, 이는 기업과 경영자 위주의 지원책일 뿐이다. 전쟁보다 위험한 바이러스 재난 현장 한가운데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선원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은 여전히 부족하다. 정부의 위기 대응이 치우침 없이 폭넓게 펼쳐지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이뤄지기를 바란다.


 

▲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장

피해 입은 노동자·영세 자영업자 외면, 재계요구만 수용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장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로 일시적인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지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 재계가 요구한 것은 사태로 인한 일시적 어려움에 대한 지원보다는 노동시간단축 무력화, 탄력근로제 확대 등 제도적인 것들이다. 지금 사태와 관계없는 것들까지 모두 들이밀고 있다. 정부는 재벌 총수들의 규제완화 요구를 모두 들어주겠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미 노동시간단축의 시계는 거꾸로 돌고 있다.

정작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은 보이지 않는다. 절차도 까다롭고 실효성도 의심되는 금융지원을 대책으로 내놓고 있다. 노동자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일하지 못하게 된 특수고용 노동자들, 정부가 휴업을 명령했거나 사용자가 자발적으로 휴업한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임금손실의 피해를 보고 있다. 정부는 이 피해를 보전하는 방안이나 관련 지침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코로나19를 핑계 삼아 오래 묵은 민원을 처리하려는 재계를 만나기 전에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를 먼저 만났으면 어땠을까. 관련 대책을 시급히 세워야 한다.


 

▲ 이정훈 민주노총 정책국장

“대기업에 주문할 것이 별로 없다”는 청와대 유감
이정훈 민주노총 정책국장

“너무 잘해 주고 계시다.” “대기업에 대해서는 주문할 것이 별로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3일 6대 그룹 총수와 경제단체장 등 재계 인사들과 코로나19 대응 경제계 간담회를 열고 했던 발언이다. 이후 재계의 요구 16가지를 전폭적으로 모두 수용한다고 발표했다.

코로나19 상황으로 경기위축 우려가 커지고 있어 대기업의 동참과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위기 상황이라고는 하더라도 대기업 기를 살려 주는 립서비스를 넘어서 ‘친기업 행보’의 도가 지나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저녁 회식을 주 52시간 근무에서 예외로 해 달라”고 건의하고, 이에 정부는 “회식은 주 52시간제와 무관하다는 것”을 적극 홍보한다며, “신속하게 카드뉴스 등 홍보물을 제작·배포하겠다”고 답변했다. 반강제성이 있는 회식에 대한 여성·청년과 대다수 노동자들의 거부감은 안중에도 없고, 더구나 코로나19로 단체모임을 자제하는 분위기에서 말이다.

업무의 연장이나 다름없는 회식 강제를 정부가 앞장서서 대국민 홍보까지 한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탄력근로제 확대 추진과 최근 특별연장근로 인가 사유 확대에 이어 재벌 민원해결을 위한 청와대의 ‘노동시간단축 포기’의 상징적인 모습이다.

또한 대통령이 모두발언에서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 쾌거를 언급하면서 CJ그룹을 치켜세웠다.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영화스태프 노동자들이 주 52시간을 준수하고,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더라도 충분히 명작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을 추어올려야 했다.

청와대는 심지어 환경 법령 규제완화도 수용하기로 했다. 적극행정 감사면제, 기업 금융대출 지원, 세금 유예와 감면 등 기업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대통령 말대로 대기업은 잘 하고 있으니, 대기업에 지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정부는 코로나19로 지원대책에 소외된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 취약서민층이 없는지 찾고 지원해야 한다. 싼 인건비 찾아 중국에 공장을 마구 이전하고 국내 노동자들은 손가락만 빨게끔 하다가, 중국공장이 멈추니 자신들의 이윤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나면 안 되기에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쥐어짜 특별연장근로를 강요하고, 세금을 감면해 달라는 재벌대기업들이다. 노동자 서민을 위한 적극행정, 유급휴가 지원, 인력충원 지원, 노조 설립신고증 신속 교부 등 노동자·서민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청와대는 기대할 수 없을까.


 

▲ 이지섭 금융노조 대변인

청와대 분별 잃어, 위험 키우는 재앙의 씨앗 될 것
이지섭 금융노조 대변인

코로나19 대응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냉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분별력이다. 혐오에 기반한 무분별한 공포 조장, 사태의 심각성을 악용한 무분별한 민원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재계의 건의를 전폭 수용하겠다는 청와대는 스스로 분별을 잃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코로나19 사태를 지역사회 감염 확산이 본격화되는 상황으로 진단하고 있다. 목숨을 위협하는 이 질병의 창궐이 멈추지 않는 한 그 어떤 조치도 경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는 없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를 회피해 회식을 활성화하고, 확진자가 발생해도 공장을 가동시키고, 화학물질등록평가법 등 환경 법령을 유연하게 적용하자는 재계의 건의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코로나19 확산 위험을 키우는 재앙의 씨앗이 될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악용해 민원을 해결해 보려는 재계와 보여 주기식 퍼포먼스를 위해 그 미끼를 덥석 문 청와대 모두 비판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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